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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BS
Q.  대만 총통후보는 어떤 성향의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은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국과 중국의 관계 설정이 11월 바이든과 시진핑의 만남으로 예정된 가운데 양대국의 최대 쟁점 이슈 중 하나인 대만 총통 선거도 2024년 1월 13일에 예정되어 있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시진핑이 대만 이슈를 자신의 정치 경제적, 외교 안보적 위기 극복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고, 특히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양안 관계 충돌 여부도 향후 누가 대만의 미래를 이끌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각 당의 후보는 민주 진보당(DPP) 라이칭더(Lai Ching-te), 국민당(KMT) 허우위이(Hou Yu-ih), 대만인민당(TPP) 고원제(Ko Wen-je)다.지난 8월 14일부터 15일까지 조사에서는 DPP 라이칭더가 43.4%, TPP의 고원제 26.6%, KMT의 허우위이는 13.6%를 기록했다.대만 민의기금회의 9월 중하순 조사에서도 라이칭더가 31.4%, 이어 고원제 23.1%, 허우위이가 15.7%, 무소속 곽대명이 10.5% 순이었다.10월 현재는 여당인 DPP 라이칭더 후보가 36.7%로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TPP의 고원제가 19.4%, 3위는 허우위이 17.7%, 4위는 곽대명이 6.2%로 나오고 있다.현재 집권당에 대한 지지율이 49.6%로 반대가 45.8%를 웃돌고 있다. 이는 바이든 정부와의 연계를 깊게 해 온 현 정권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며, 이 여론이 라이칭더에게 유리하게 작용함을 말해준다.현재 선거는 여당 후보에 다수의 야당 후보가 맞붙고 있어, 야당의 연합이 성립되지 않을 경우 여당 후보의 승리가 예상되는 구도다.따라서, 이번 선거의 중요한 초점은 야당의 연합, 단일 후보 도출 여부다. 야당 후보들의 지지율의 합은 여당 후보를 앞선다.선거의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는 중국과의 거리감으로, 여당은 대중 강경 노선을 이어가고 있으며, 야당은 대중 융화 노선을 주장하고 있다.여당인 DPP는 대만 독립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대만의 경제 성장과 안보 강화를 이루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반면, 야당인 KMT는 중국과 화해 노선을 취하고 있으며, 중국과의 화해를 통해 대만 경제 발전과 안정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차이잉원 총통은 10월 10일 대만의 독립기념일 행사인 광복절 기념식에서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온건한 표현을 사용했다. “중국과 관계를 현상 유지를 핵심으로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공존의 길을 발전시켜 나가고 싶다”라고 말했다.이는 대만의 여론이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더욱 온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대만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만 국민의 약 60%가 중국과 평화공존을 지지하고 있다. 이는 과거에 비해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대만 국민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바라는 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또한, 자신의 후계자인 라이칭더가 총통 선거에서 리드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이 총통은 라이칭더가 중국과의 관계에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것을 다소 우려하고 있다. 여론의 변화를 감안해 수위를 조정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본인이 나서서 대중 융화 노선을 강조함으로써 야당이 쟁점화할 수 없도록 막으려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이는 향후 총통 선거에서 여당 후보가 중국과의 관계에 온건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노선 차이가 줄어들 경우 쟁점은 후보 단일화로 초점이 옮겨진다. 야당 후보들의 공통점은 중국과의 화해노선이다. 따라서, 지지율을 합치면 라이칭더를 앞서기 때문에 이들의 단일화 가능성은 선거의 판세를 가를 주요 변수이다.젊은층에 인기가 있는 고원제 후보는 어느 쪽이 총통 후보가 될지 여론조사 방식으로 결정하자는 입장이다.하지만, 국민당 내의 의견은 정리되어 있지 않다. 지지율로 자당의 후보가 약간 뒤지는 데다 한때 대만을 이끌어온 국민당이 총통 선거에 후보자조차 세울 수 없게 되었을 경우에 대한 우려가 계속되고 있다.중앙선거위원회에 입후보 신고가 11월 20~24일로, 1개월 안에 부총통 후보 선정과 총통 선거 공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다. 또한, 아직 본격적인 토론도 시작되지 않았다.한편, 총통 선거와 동시에 진행되는 입법위원(국회의원) 선거도 관심사다.입법위원 선거는 대만의 입법원(국회)을 구성하기 위한 선거로, 단원제이며 의석수는 113석이다. 지역구 73석과 전국구 40석으로 구성된다.DPP 관계자는 총통 선거에서 라이칭더 후보가 승리하더라도 입법위원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이는 DPP가 장기 집권한 데 따른 피로감과 견제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DPP는 총통 선거와 입법위원 선거에서 모두 승리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칠 예정이지만, 야당도 총통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야권 후보 단일화를 추진할 수 있다.야당이 다수를 차지하면 예산안이나 법률안 처리가 어려워질 수 있다. 현재 야당은 중국과의 화해를 중시하기 때문에 미국에서 무기 구매 등 군비 관련 예산 처리에 반대할 수 있고, 이는 동아시아 안보에 영향을 줄 수 있다.
Q.  일제 강점기 잔재들은 어떤것이 잇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생활 속 언어우리말과 혼용되어 있는 한국말젓가락 = 와리바시 , 단무지 = 다꽝 , 하늘색 = 소라색 양념 = 다대기 , 양동이 = 바깨스2. 구권에 존재하는 일제 잔재한국은행 직인 일본의 국인인 '히노마루'의 도안을 그대로 본떠서 사용했다.3. 인감증명1914년 식민지경제수탈을 목적으로 도입토지조사사업 등 현재까지 사용 중4. 국회의원 금뱃지1948년 실제로 일본 의회를 따라서 만듦5. 교육현장쎄쎄쎄, 아침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이 놀이도 일제의 잔재유치원이라는 명칭도깨비도 일본 잔재 '혹부리 영감'은 일본의 오니한국판 도깨비는 인간과 비슷한 외형
Q.  한복은 언제부터 유래되어서 입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조선시대에 이미 초의생활(草衣生活)에서 벗어나 칡과 삼으로 짠 옷감을 사용하고, 전잠(田蠶)과 직조의 기예가 늘어감에 따라 의류문화에 진전을 보여주었다. 그후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에는 옛 사기(史記)나 고분벽화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대체로 유(襦) ·고(袴)와 상(裳)·포(袍)를 중심으로 한 복장이었으며, 여기에 관모(冠帽)·대(帶)·화(靴) 또는 이(履)가 첨부되었다.유는 저고리로서 상체의 옷이고, 고는 바지, 상은 치마로서 하체의 옷이며, 여기에 머리에는 관모를 쓰고, 허리에는 대를 띠며, 발에는 화 또는 이를 신어 포피(包被)로서의 의복의 형태를 갖추는 동시에, 그 위에 두루마기로서의 포를 더함으로써 한대성(寒帶性) 의복 곧 북방 호복(胡服) 계통의 의복을 나타낸다. 이에 있어 유(저고리)는 곧은 깃에 앞을 왼쪽으로 여몄으며[左衽], 소매가 좁고[筒袖], 길이는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오늘날의 승복 '동방'과 비슷한 것이었으며, 허리에 띠를 둘렀는데, 특히 깃·도련·소맷부리에는 빛깔이 다른 천으로 선(襈)을 둘렀다. 이후 중국과 교류가 잦아지면서 중국복식의 영향을 받아 좌임이 우임(右衽)으로 변하고 소매도 넓어지는데[寬袖], 선은 오늘날에도 회장·끝동 등으로 남아 있다. 이 저고리를 신라에서는 위해(尉解)라고 일컬었는데, 오늘날 저고리를 우티·우치라고 하는 방언(方言)도 이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저고리라는 표현은 조선 세종(世宗) 2년(1420) 원경왕후(元敬王后) 선전의(選奠儀)에 '赤古里'라는 말로 처음 나온다.고(바지)는 용도에 따라 폭과 길이에 변화가 있었는데, 양복바지와 같이 폭이 좁은 궁고(窮袴:細袴)와 지금의 한복바지와 같은 대구고(大袴:또는 寬袴)가 있었고, 오늘날의 잠방이와 같은 가랑이가 짧은 곤(褌)이 있었다. 궁고는 곤과 더불어 민층의 하의(下衣)였고, 대구고는 상류층의 하의였는데, 발목을 대님으로 묶기도 하였다. 이 바지를 신라에서는 가반(柯半) 또는 가배(柯背)라 하였는데, 지금 우리말의 고의·고쟁이도 이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으며, 바지라는 표현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인지(鄭麟趾)가 '把持'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이 호칭은 이미 널리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당시는 여자도 바지를 입는 것이 기본 복제(服制)였기 때문이다.상(치마)은 여자 전용의 하의로서, 고와 상을 혼용하였다. 형태는 일반적으로 길이가 길고 폭이 넓어 땅에 끌릴 정도였으며, 허리 부분부터 치맛자락 끝까지 잔주름이 잡혔고, 다시 치맛자락 끝에 일종의 장식연(裝飾緣), 곧 선을 둘러 조선시대의 스란치마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상을 치마로 표현한 첫 기록은 앞에서 든 원경왕후 선전의에 '赤古里'와 함께 나오는 '赤亇’로서, 한글로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빈(嬪)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한중록(閑中錄)》에 처음으로 등장한다.포(두루마기)는 표의(表衣)를 뜻하는 것으로서, 당시에는 유와 고 위에 착용하여 양복의 외투와 형상이 비슷하였는데, 오늘날의 두루마기에서와 같이 직령(直領)·교임(交衽) ·중거형(重裾型)의 것이 아니고 직령·교임·직수형(直垂型)의 것이었으며, 여기에 띠를 둘렀다. 이 포를 당시에는 왕공(王公) 이하 평민에 이르기까지 남녀가 모두 보편적으로 착용하였다. 포를 가지고 두루마기라 한 것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옷의 폭을 쭉 돌아가면서 다 막았다는 데서 나온 순수한 우리말 표현이며, 주의(周衣)라는 명칭은 이를 거꾸로 한자화(漢字化)한 것이다.이러한 한복의 기본형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없다. 다만 관복(官服)에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眞德女王 2년) 중국 당(唐)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습용함으로써 고려·조선시대까지 중국의 제도를 준용하였다.중국과 한국은 정치·문화 교류를 통하여 양국의 복식도 서로 영향을 끼쳤는데, 신라의 경우는 반비(半臂)·배당(褙襠)을 비롯하여 여자 포제(袍制)로서의 활수의(闊袖衣)·색사대(色絲帶)가 그것이다. 고려 때에는 제25대 충렬왕(忠烈王) 이후 원(元)나라의 부용국(附庸國)이 되면서 복식 풍습도 몽골풍(蒙古風)을 많이 따랐는데, 질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으며, 제31대 공민왕(恭愍王) 때 원나라가 쇠망하고 한족(漢族)의 명(明)나라가 다시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몽골풍은 사라졌다.그러나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진 것은 몽골 복식의 영향이며, 이로 말미암아 띠가 없어지고 대신 고름을 달게 되었다. 또 여자 화관(花冠)이 당나라에서 전해 온 것이라고 하면, 족두리는 몽골인의 고고리(古古里:姑姑, 顧姑)였다.조선시대에는 임진(壬辰)·병자(丙子)의 두 국란을 겪으면서 우리 민족의 자각심이 일기 시작하여 민족 복식을 형성한다. 이에서 두드러진 것은 남자의 포제와 입제(笠制)이며, 여자의 예복과 친의류(襯衣類:속옷류)이다. 남자의 포제는 포의 기본형에서 고려의 백저포(白紵袍)를 거쳐 직령(直領)→ 도포(道袍) → 창의(氅衣)에서 조선 말기의 주의(周衣)로 발전하며, 입제는 평량자(平梁子) → 초립(草笠)·흑립(黑笠)으로 발전한다.여자의 예복은 중국의 활수의·색사대에 속한 적의(翟衣)·대삼(大衫) 등이 원삼·활옷·당의 등으로 국속화(國俗化)되었고, 친의류는 단속곳·바지 또는 고쟁이·속속곳·다리속곳·너른바지 등으로 다양해진다. 그리고 조선 말 개화기에는 양복·양장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한복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졌다.
Q.  미국 프로야구 개막식 한국에서한다는데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3월 20일과 21일에는 서울에서 경기가 치러지며, 이후 3월 29일에는 본토에서의 개막전이 예정되어 있다.MLB 사무국은 2024년 MLB 정규시즌 일정을 확정하고 공개했다. 그 중에서도 김하성이 뛰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박찬호, 류현진 등이 뛰었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는 내년 3월 20일과 21일에 서울에서 개막전을 치를 예정이다.이는 메이저리그의 역사에서 미국 밖에서 개막전을 치르는 것은 2019년 일본 도쿄 경기 이후 4년만의 일이다.한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는 한국에서의 개막전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펫코 파크에서 3월 29일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본토 개막전을 다시 벌일 예정이다.
Q.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인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누가 언제 처음으로 이 말을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음악의 아버지라면 음악을 탄생시킨 사람, 다시 말해 음악의 선구자라는 말인 셈이니 작곡가에게는 정말 어마어마한 칭송이 아닐 수 없죠. 물론 실제로 그만큼 바흐는 위대한 작곡가였습니다. 바흐가 남긴 아름다운 곡들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랑을 받고 있고요.바흐가 바로크 시대 음악의 표준이 되는 이론적인 틀을 마련하였다면 헨델은 그 틀을 기반으로 하여 오페라나 오케스트라, 합창과 같은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감으로써 그 시대의 음악을 더욱 빛나도록 했다는 거예요.같은 시대 같은 나라의 같은 해에 태어난 음악가라서 묶이는 게 있기도 하고 바로크 시대 음악의 큰 틀을 마련한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라면 음악을 여러 방면으로 잘 활용하여 선보인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로 보겠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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