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중국 상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상나라는 은허(殷墟)를 주요 도시로 건국되어, 약 기원전 17세기부터 기원전 11세기 무렵까지 존재했던 국가이다. 주로 은(殷)이라고도 많이 불리지만, 적어도 상나라 사람들 자신들은 스스로를 은나라 사람이라고 부른 경우는 없다. 은이라는 통칭은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가 은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인구밀도가 매우 낮은 고대여서 당시 국가의 실질적인 인구는 수도에 몰려살았기 때문에 사실상 상과 은 두 가지 표현이 혼용되었고, 상나라 이후 시대부터 유명 학자나 정치인들이 상나라 시대 이야기를 할 때 '과거 은 시절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과거 은의 누구는 이런 말을 했었다.'하면서 기록을 남기는 바람에 중국 역사 기록에 상나라라는 표현보다 은이라는 표현이 훨씬 심하게 난무하면서 오해가 퍼진 것이다. 그러나 장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상인'이라는 말이 '상나라 사람'에서 나온 말이므로 상나라라는 표현이 그렇게 안 쓰였던 것도 아님은 분명하다.고도로 발달한 청동기 기술을 가졌으며, 기원전 12세기 무정(武丁)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했고, 주변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며 영향력을 키웠으나, 지나친 인신공양으로 인한 반발과 동방정책 등으로 인해, 기회를 엿본 주나라에게 멸망 당하고 만다.한때는 거의 전설상의 왕조로 여겨질 정도로 실체가 의문시되었으나, 갑골문의 발굴과 해석이 활발해지고, 은허 유적 등이 발견되면서 이제는 누구도 존체 자체는 의심하지 않는다. 문헌과 유물로 확인할 수 있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왕조 국가.상나라에서는 대규모의 인신공양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갑골문과 발굴된 해골 등으로 인해 확인된 사실로, 이 시대는 아즈텍 문명에 버금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준의 인신공양이 벌어졌다. 순장 제도 등의 모습은 상나라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나타나기는 하나, 규모 면에서는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수준.
Q. 원반 던지는 사람 조각품에 대해서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반 던지는 사람》(Discobolus, 그리스어: Δισκοβόλος, 디스코볼루스)은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 미론이 제작한 청동상이다. 제작연대는 기원전 460년~450년으로 추정된다. 미론이 제작한 원본은 소실되었지만, 그 작품을 그대로 본딴 고대 로마의 복제품들이 여럿 전해지고 있으며, 그 집에서 원본보다 축소된 청동상과 1791년에 발굴된 대리석 조각상이 가장 유명하다.미론은 기원전 480년부터 기원전 440년까지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작가로, 당대 최고의 조각가로 이름났다. 아테네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낸 그는 특히 운동 선수의 조각상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주로 청동으로 작업하였는데 역동적인 자세와 사실적이고 섬세한 세부묘사를 할 수 있었고, 대리석보다 가볍고 옮기기도 쉬웠기에 그와 비교하면 많은 이점이 있었다. 도 그러한 사정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은 손에 원반을 잡고 던지기 위해 몸을 회전할 준비를 하면서, 팔을 뒤로 빼고 체중을 오른발에 싣고 있는 자세의 운동 선수를 소재로 했다. 미론은 선수가 순간적으로 정지한 상태를 포착하였는데, 이와 같은 우아한 조화와 균형이 나타나는 행동의 순간을 '리스모스 (reythmos)'라 일컬었다. 미론은 이 리스모스의 상태를 재현한 최초의 조각가로 평가받는다.원반 던지는 사람이 몸을 비틀고 있는 이유는 해부학적으로 완벽한 모습의 인물과 운동감을 묘사하고 싶어했던 당대 조각가의 요구를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운동선수들의 누드는 울퉁불퉁한 근육을 상세히 묘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미론은 원반을 던지는 순간을 몸의 긴장된 힘과 섬세한 균형으로 전달하였다. 원반을 던지는 인물은 원반을 돌아보면서 긴장되기보단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고대의 조각가들은 스포츠의 이상을 미학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얼굴 표정보다는 몸의 형상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조각상의 비율은 오른쪽 넓적다리와 왼쪽 종아리, 몸통과 오른팔이 이뤄낸 각으로 강조되었다.
Q.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방어를 지휘한 인물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의고려 초기에 여진족 등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여 압록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북쪽 변경에 쌓은 장성.건립경위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한 것은 동북 변경의 여진족, 서북 변경의 거란족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건국 이래 고려는 변경의 방비를 위해 관방(關防: 변방의 방비를 위하여 설치한 요새) 시설을 쌓았는데, 1014년(현종 5)에서 1030년(현종 21)에는 동북, 서북 양면의 요새 여러 곳에 성곽을 쌓았다.특히 성종~현종 대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은 북계 지역의 방어 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서북 방면으로는 용주 · 철주, 안의진, 청새진, 그리고 지금의 의주인 위원진 · 인주 · 영덕진 등의 성을 쌓거나 보수하였고, 동북 방면에는 의주, 영평진, 요덕진, 상음현, 현덕진, 용진진 등의 성을 새로 쌓거나 보수하였다.그러므로 천리장성의 축조는 이렇게 쌓은 북쪽 변두리 땅의 성(城)과 진(鎭)을 토대로 하여 1033년(덕종 2)부터 이들 관방을 선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추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려사(高麗史)』에 “서북로의 송령(松嶺) 동쪽으로 장성을 쌓아 변방 적들의 침입을 막고자 하였다.”라고 한 것이 그러한 점을 말해 준다. 요새지 거점에 대한 관방 시설만으로는 방어상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들 거점성을 중심으로 방어 체계를 하나의 연결선으로 전면 보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변천천리장성의 축조는 1033년(덕종 2) 8월 왕이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 ?~1038)에게 명해 북쪽 변경에 관방을 쌓게 한 것이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이것이 1차 장성의 축성인데, 이는 거란과의 외교적 긴장 속에서 국경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작업은 이후 1035년(정종 1)과 1041년(정종 7) 2차와 3차 장성의 축성으로 이어져 북계 지역의 국경 지역을 아우르는 장성이 이루어졌다.형태와 특징천리장성의 위치는 서해안에 있는 옛 국내성(國內城) 경계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지금의 의주(義州) 지역인 위원 · 흥화 · 정주 · 영해 · 영덕 · 영삭 · 정융 · 영원 및 그 부근의 평로 · 맹주 · 삭주 · 운주 · 안수 · 청새 등의 13성(14성)을 거쳐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永興) 지역인 요덕 · 정변 · 화주 등의 3성에 연결되어 동해안에 이른다.북한 학계에서는 천리장성이 압록강 하구에서 평안북도 북쪽, 자강도 희천, 평안남도 북단을 지나 함경남도 금야군과 정평군의 동해에 이르는 약 630㎞이며, 4단계에 걸쳐 구축된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의의 및 평가고려는 10세기 이후 거란, 여진, 몽골의 발흥에 의한 정세 변화 속에서 북쪽 변경으로부터의 지속적 외침의 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만큼 북쪽 변경의 군사적 중요성은 어느 시대보다 막중하였다. 한계는 있었지만, 군사적 방어가 가능했던 이유는 현종 대 이후 관방 시설의 적극적 구축과 천리장성 조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려 사회가 정치적 · 외교적 · 제도적으로 안정을 기하면서 천리장성은 국경선의 기능, 혹은 문화권의 구분선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동북 방면은 장성 밖으로 길주(吉州)까지 기미주(羈縻州)가 설치되어 있어 장성은 여진족과 혈통이 섞이는 것을 막고, 문화적 차이를 구분하려는 구분선과 같은 기능을 가졌다. 그러나 동북 여진 정벌 후 성이 여진에게 반환된 뒤로 천리장성은 국경선으로서의 의미도 갖게 되었다.
Q. 중국에는 어떠한 이유로 왕씨가 많은걸 까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안부 호정관리연구센터가 발표한 '전국 성명 보고서'에 따르면 왕은 호적별 인구 수에서 2022년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성으로 한족 인구의 7.94% 정도를 차지한다고 합니다.중국 국가통계국 2014년 발표한 공식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 대륙의 왕씨 성을 가진 인구는 9,458만 명에 달한다고 하니다.한국에서 발행되는 중국어 학습서적이나 교과서 다이얼로그를 보면 왕씨가 많은지 이해가 되는 규모입니다.중국 동부 기준 38.3% , 중부 26.0% , 서부 기준 23.5%, 동북성 12.2% 비중입니다.그 뒤로 이씨, 장씨, 유씨, 천씨, 양씨, 황씨, 조씨, 오씨, 주씨 입니다.
Q. 우리가 정신병을 본격적으로 질병으로 인식한 시기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신과를 의미하는 단어인 psychiatry는 고대 그리스어로 "영혼"을 의미하는 단어와 "치료"를 의미하는 단어를 합쳐 만들어진 단어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마음, 곧 정신을 치료한다는 것은 영혼을 치료한다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그에 걸맞게 정신과가 치료하는 "병"은 정말 많다. 당장 알코올 중독과 담배 중독(흡연 탐닉)이 정신과의 관할이다. 이중 알코올 중독은 정신질환 중 제일 악질 중 하나로 정신과의 최종보스이며, 흡연도 치료 난이도에서는 헬 수준이다.산업 혁명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신질환이라는 개념 자체가 일반 백성들에게 아예 없었다. 역사에서 흔히 폭군이라고 기록된 이들 중 상당수도 사실 심각한 정신질환적 증세를 겪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환자였던 것. 이는 궁예와 연산군이 대표적이다. 오늘날의 정신건강의학으로 볼 때, 왕위에 오르면서 편집성 성격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이 발병하였고 망상, 환각, 의심 등의 행동 이상이 악화되면서 무자비한 폭군들이 된 것으로 보인다.정신질환이 심각한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것을 깨닫고 난 뒤부터 인류는 정신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각종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50만 년 전 석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에 구멍이 뚫린 인골들이 종종 발견되고 있다. 정신질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서 악령을 몰아내려고 시도했던 흔적인 것. 세계 각처에서 샤먼들과 신관들이 기도문을 외고, 악령과 협상(…)을 시도하거나 간청하기도 하고, 별다른 쓸모도 없을 마술을 시행했으며, 이도저도 답이 없으면 가혹하게 매질을 해서 "정신을 차리게" 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굶기기도 하였다.중세 서유럽에서는 로마제국 시절의 의학을 상당히 잘 계승 받아 발전시킨 이슬람권 의학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는 받아들이지 않아 정신질환자들에게 매우 좋지 않은 시대였다. 물론 몇몇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정신질환은 미친 것을 넘어 악마에게 홀린 것으로 여겨젔다. 무도병(tarantism)을 치료하기 위해 타란툴라 춤을 추게 하는 얼토당토않은 방법을 썼으며, 각종 집단 히스테리가 엄청나게 기승을 부렸다.정신질환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던 중세 동로마 제국, 특히 세계 최고의 병원이 있던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는데, 아직 정신질환의 구분이 잘 되지 않아 미친 것으로 퉁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귀신이 들린 것"으로 판단하기는 했으나, 환자의 신체에 이상이 있어서 귀신이 든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타당한 접근을 통해 치료를 한 기록이 남이있다. 물론 "귀신을 쫓기 위해" 성수는 필수적으로 처방되었다.그러다가 유럽에서 도시가 형성되고 관료 세력들이 힘을 얻으면서부터, 비로소 장애인들이 종교 집단의 손에서 벗어나 국가의 손으로 옮겨졌다. 물론 그것이 곧바로 인간 존엄성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가혹하고 열악한 조건의 수용소에서 짐승만도 못한 생활을 해야 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심지어 19세기에 이를 때까지 수용소(asylum)에서는 창살이 달린 고정 침대 같은 가혹하고 터무니없는 치료가 행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현대에도 정신의학 전문가들이 태부족한 방글라데시와 같은 개도국에서의 정신병원은... 그냥 벌거벗고 다니며 땅바닥에 널브러진 음식 부스러기들을 되는 대로 주워먹는 생활을 하고 있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다. 정신질환 환자들의 존엄성은 과학에 기반한 현대적 정신의학의 발전에 의해 함께 향상되어 왔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