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인도에 힌두교가 전파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힌두교(Hinduism, 산스크리트어: हिन्दू धर्म) 또는 사나타나 다르마(산스크리트어: सनातन धर्म)는 인도 신화 및 브라만교를 기반으로 형성된 인도 계통 다신교로,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에서 널리 믿는 종교이자 인도의 민족종교 및 최대종교이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ū)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은 넓은 강을 의미하는 ‘신두(Sindhu)’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인도와 같은 어원이기 때문이다. 힌두교라고 할 때 민간 힌두교 전통과 베다 힌두교 전통에서 비슈누파와 같은 박티 전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잡한 전통 전체를 뜻한다. 또한 요가 전통과 카르마 개념에 기초한 매일의 도덕적 삶과 힌두 결혼 풍습과 같은 사회적 일반 규범도 포함한다.힌두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다음 가는 세계에서 3번째로 신도 수가 많은 종교다. 그 수는 2005년 기준으로 9억 4천만명에 달한다. 힌두교의 발생은 고대 인도의 종교 사상인 베다와 인도 신화에서 비롯하며, 베다 사상은 기원전 15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다는 초기 힌두교 종교이며, 그 경전은 현존하는 문학 문헌 중 가장 오래 되었다고 여긴다. 힌두교 신자는 출신 지역이나 가문과 연계한 신 하나를 섬기지만, 여러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다신교적 일신교(택일신교 또는 일신숭배)다. 다양한 지역적 신들이 하나의 종교사상으로 연합한 형태의 종교이므로 교주(敎主) 즉 특정한 종교적 창시자가 없는 특징이 있다.근대 이전에 인도 부근의 네팔, 인도네시아 지역에 전파되었으며 근대에 이르러 인도인들의 이주에 따라 세계 각지로 전파되었다. 힌두교의 많은 신들과 주요 사상은 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불교의 전파와 함께 힌두교의 신화와 전설이 전파되었다.네팔은 2008년 힌두교를 국교로 지정했었지만 2015년부터 민주화로 인해 국교가 아니게 되었다. 인도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나 많은 사람들이 힌두교를 믿는다. 또한 힌두교는 굽타왕조의 지원 아래 확산되었다.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는 마다가스카르 동쪽의 모리셔스가 힌두교가 종교 중 최다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서울 용산구 용산동 2가 해방촌에 크리슈나를 모시는 힌두교 사원, 즉 스리 라다 샤마순더르 사원이 있었다. 과거 위치. 용산동 2가 고바우 슈퍼 근처에 위치했는데, 그 고바우슈퍼는 현재 GS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그 힌두교 사원은, 경의중앙선 한남역 근처에 이사간 후 하레 크리슈나 사원(Hare Krishna Temple)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557-47[46]이고, 사원은 '청운독서실' 건물의 1층에 있다. 하지만 간판이 없기 때문에, 도착하더라도 어리둥절할 수는 있다.
Q. 잉카 문명은 언제 있었던 문명이고 어떻게 멸망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잉카 제국, 혹은 타완틴수유[는 1438년부터 1533년까지 약 100년 간 남아메리카 일대를 다스린 대제국이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이전의 남북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으로 군림하면서 남미 대륙 태평양 연안 대부분을 다스렸다. 현재의 페루, 에콰도르 서부, 볼리비아 남서부, 칠레, 아르헨티나 북서부, 콜롬비아 남서부 등 총 6개국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도 했다.잉카족은 12세기경 현재의 쿠스코 근방에 거주하던 부족이었다. 전설적인 지도자인 망코 카팍의 시대에 잉카 제국의 전신인 쿠스코 왕국이 세워졌으며, 정복군주이자 초대 황제인 파차쿠티-쿠시 유판키의 재위기에 인근의 창카족을 정벌하고 페루 지역 대부분을 빠르게 먹어치웠다. 쿠스코 왕국은 파차쿠티의 시대에 영토를 4방위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등 소규모 부족국가에서 본격적인 제국으로서 탈바꿈했다. 파차쿠티가 1471년에 붕어하자 그의 아들인 투팍 잉카 유판키가 그의 뒤를 이어 치모르 왕국을 정복하고 손자인 우아이나 카팍이 에콰도르 남부까지 진출하면서 잉카 제국의 강역을 최대로 넓혔다. 잉카 제국은 북쪽 뿐만 아니라 남쪽과 동쪽으로도 확장 사업을 펼쳤으나, 남쪽에서는 마푸체족의 극렬한 저항으로 더이상 영토를 넓히는 데 실패했고 동쪽에서는 아마조니아 원주민들의 게릴라전에 휘말려 포기했다.강대했던 잉카 제국도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천연두로 붕어한 이후 형제들끼리 내전이 벌어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황제의 두 아들인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 사이에서 제위계승전쟁이 일어났고, 제국은 두 쪽으로 갈라져 분열되었다. 그 상태에서 결정적으로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건너왔고, 168명의 스페인군이 옮겨온 전염균들에 면역이 없었던 잉카인들이 떼로 죽어나가면서 안그래도 약해진 잉카 제국은 더더욱 세력이 줄어들었다. 우아스카르를 내전에서 꺾고 황제에 오른 아타우알파는 잉카를 정복할 기회만을 노리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계략에 휘말려 포로로 잡혔고, 몸값으로 방 하나를 2번 채울 정도의 황금을 바쳤으나 결국 풀려나지 못하고 처형되었다.아타우알파 황제가 교수형 당해 죽은 이후, 피사로는 후임으로 망코 잉카 유판키를 새로운 꼭두각시 황제로 추대했고, 허수아비 제국을 부여잡은 채로 남미의 재물을 약탈하고 본격적인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렸다. 망코 잉카 유판키는 처음에는 스페인인들에게 협력하는 체 하다가 결국 빌카밤바로 도망가 신잉카국을 세우고 스페인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 저항운동마저 최후의 사파 잉카인 투팍 아마루가 사로잡혀 처형당하면서 끝났고, 이후 남아메리카 지방은 스페인 제국의 혹독한 통치하에서 신음하게 된다.현대에는 마추픽추 등 험한 산꼭대기에 거대한 도시들을 세운 문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보통 황금과 보물이 넘쳐났던 신비한 고대 문명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 같은 아메리카 대륙의 아즈텍 제국이나 마야 문명과도 자주 혼동되는 편인데, 잉카 제국은 아즈텍 제국이나 마야와는 달리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세우지 않았으며 정글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건조한 산맥 지대가 주 터전이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잉카의 신왕(神王) 제도와 막대한 부를, 아즈텍의 호전성과 인신공양을, 마야인들의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피라미드 등을 모두 모아 만들어진 가상의 문명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더더욱 잉카와 아즈텍, 마야를 헷갈려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잉카 제국의 몰락 원인은 여러모로 멕시코 지역에 있었던 아즈텍 제국과 흡사하다. 중앙정부의 잔인한 학살과 폭정으로 반감을 사고 있던 와중에 스페인인들이 들어와 반란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고, 잉카 제국은 거기다 내전 문제까지 겹쳐 그야말로 망하기 딱 좋은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잉카 제국은 아즈텍 제국보다 인신공양을 적게 했으므로 인신공양 풍습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47], 대신 반란을 일으킨 지역에서 모든 남자들을 학살하거나 인구의 절반 이상을 쓸어버리는 등 잔인한 보복은 오히려 아즈텍보다 더 심했다. 다만 잉카 제국이 무작정 사람들을 죽여대는 살인 국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잉카인들은 기본적으로 영토를 확장할 때에 평화로운 외교술을 선호했고, 언제나 친선 사절을 먼저 보내 복속 여부를 물었으며 평화적으로 해결될 일이라면 그렇게 했다. 하지만 반란을 일으키거나 자신들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얄짤없이 잔혹하게 보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