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이 추수 때 걷은 수확물 중 소작료, 빚 또는 그 이자, 세금, 각종 비용 등을 지급하고 난 뒤 나머지 식량으로 초여름에 보리가 수확될 때까지 버티기에는 그 양이 절대 부족하다.
따라서 이 때에는 풀뿌리와 나무껍질[草根木皮] 등으로 끼니를 잇고 걸식이나 빚 등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으며, 수많은 유랑민이 생기게 되고 굶어 죽는 사람 또한 속출하였다. 이 때, 식량이 궁핍한 농민을 춘궁민 또는 춘곤민(春困民)이라 하였다.
추수기 전에도 피고개[稗嶺]라 하여 식량궁핍기가 있고, 이 때에 식량이 떨어진 농민을 추궁민 또는 추곤민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기간의 길이와 심각성에 있어 보릿고개가 피고개보다 훨씬 심하였다. 따라서 ‘춘궁맥령난월(春窮麥嶺難越)’, 또는 ‘춘풍기풍춘색궁색(春風飢風春色窮色)’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로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가뭄이나 홍수, 황해(蝗害) 등으로 인하여 벌어졌던 참담한 굶주림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정약용(丁若鏞)은 기아시(飢餓詩)를 지어 보릿고개의 참상을 그리기도 하였다.
한편 196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초근목피로 연명하여 부황증(浮黃症)에 걸린 농민들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인이 보릿고개에서 벗어난 것은 1960년대 후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실시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보릿고개가 구조적으로 정착되어 이를 연례적으로 겪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1910년대에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 일제는 농민들의 토지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온 소작농의 토지경작권마저 박탈하여 반봉건적 지주제를 확립시키고 농촌의 계급구조를 지주와 소작농으로 양극화시켰다.
자소작농(自小作農)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약 80%에 이르렀던 일제강점기의 소작농은 평균 5할을 훨씬 넘는 소작료 외에도 지조(地租) 및 각종 공과금, 용수료 및 수리조합비, 토지공사 및 수선비, 마름의 보수, 지주와 마름에의 접대비 및 증여물 등을 제하고 나면 전체생산물의 약 24∼26%밖에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농촌을 일제의 식량기지화하기 위하여 1920년대에 전개되었던 두 차례의 산미증식 계획은 우리 나라의 농민을 더욱 몰락시켰다. 산미증식은 수리조합건설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고, 이에 의한 조합비 부담의 고통은 조합원 농민이 토지를 방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농민의 소작농화 경향과 궁핍화가 더욱 심화되었고, 우리 나라의 쌀은 일본으로 수출하고 만주의 좁쌀을 수입하여 먹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한편 1930년대의 농업공황은 농산물가격을 폭락시켜 농민의 궁핍상은 나날이 더해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농가의 빚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예컨대 1930년에는 전체 소작농민의 약 75%가 1호당 평균 65원의 빚을 지고 있었고, 1933년의 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농가의 78%가 평균 115원의 빚을 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빚의 용도가 생산자금이 아니라 식량구입에 쓰여졌다는 것을 보면, 농민의 궁핍상이 얼마나 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 대부분의 빚은 수확기에 매우 높은 이자로 원금과 같이 변제되었다. 따라서 빚을 진 소작인은 소작료를 내고 빚을 갚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어 다시 식량부족을 겪는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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