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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불독44
냉철한불독4423.12.19

파독 광부님들의 당시 생활은 어땠는지 설명해주세요.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던 1960년대 국가에서 사람들을 모아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냈잖아요. 당시 독일에서 광부님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하루에 어떤 일을 얼마나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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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3~1980년까지 실업문제 해소와 외화획득을 위하여 한국정부에서 독일(서독)에 파견한 7,900 명의 광부들은 광부일의 경험이 없는 초보자로 작은 부상과 후유증 에 시달렸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19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파독 근로자(광부,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는 일반적으로 1960~70년대 경제 개발을 위한 원조 및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파견된 광부, 간호요원 및 기능공을 뜻합니다. 한국 정부의 협정에 의한 것 이외에도 민간 알선을 통해 서독으로 파견된 소수의 간호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1960년대 한국은 이전까지 주로 미국에서 무상원조를 받아오던 상황에서 미국이 서구 경제 회복과 자국 국제수지 악화에 따라 기존의 무상원조를 줄이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 다른 서방 국가에 대해서도 경제 지원의 유치를 시도했다. 이는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하기 이전부터 진행된 것으로 서독은 1961년 3월 기술원조협정 체결을 시작으로 정부 차원의 협력이 시작되었으며 1961년 12월 '한․독 정부간의 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공공과 상업차관 합계 1억 5천만 마르크(당시 환율로 3,700만 달러 상당)의 유상원조를 제공하였습니다.

    한편 한국은 인구 급증으로 인한 실업난에도 처해 있었으며 전후 부흥에 의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서독의 수요와 맞는 상황이었다. 5.16 군사정변 이전에는 대한석탄공사가 지멘스와 광부 송출 각서를 맺었다가 쿠데타로 흐지부지된 바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독 광산업계가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면서[4] 1962년 기업별로 인력 유치 의사를 밝히며 서독 정부를 압박하고 1963년 5월에 공식적으로 서독 노동부 차원의 유치 의사가 전달되면서 1963년 12월 '한국 광부의 임시 고용계획에 관한 한․독 정부 간의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광부와 달리 간호인력(간호사, 간호조무사)은 1963년에 정부가 파견하기 이전인 1950년대부터 이미 민간에서 파견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서독의 고도성장으로 간호 인력이 부족해지자 마인츠 대학교 병원에 재직하던 이수길 박사를 비롯한 한국계 의사들이나 독일 종교인들의 주선으로 1950년대부터 간호사 송출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