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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팬더곰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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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왜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인가요?

조선시대에서도 국방력을 기르기 위해서 10만 명의 군사를 육성하자던 율곡이이의 10만 양병설은 왜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인가요?

10만의 군사를 양병하여 다른 국가를 정복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던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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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줍게웃는타킨108
    수줍게웃는타킨108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실제로 이루어진 적이 없으며, 이는 후대 사람들이 조작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신 율곡 이이는 서얼 차별 완화 등의 개혁 정책을 제시하였으나 생전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율곡 이이의 '10만양병설'의 실체가 확실하지 않지만 만약 주장이 있어도 정책에 반영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붕당의 대결로 정책으로 반영되지 못했습니다. 율곡은 당시 서인으로 류성룡 등 동인의 반대에 몰렸습니다. 일본을 정탐하러 통신사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일성의 대립에서 동인의 김성일의 의견이 반영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또한 10만명의 대군을 양성할만큼 재정이 여유롭지 못했습니다. 만약 당시 농민을 징발하고, 대군 유지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면 백성의 반발도 무시 못했을 것이라는 부정적 의견으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무래도 10만 양병설과 같은 경우에느

    상당히 많은 세수 등이 확보되어야 하는 등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었기에 그런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83년 국방을 책임지고 있던 이이가 왕을 찾아와 나라가 태평하니 군대와 식량이 준비되지 않아 오랑캐가 변경을 소란하게만 하여도 온 나라가 술렁입니다. 지금대로라면 큰 적이 침범하였을 때 어떤 지혜로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라고 하여 주장하였습니다. 마침 북쪽에서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터라 이이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찮음을 느끼고 사신을 보냈으나 정사인 황윤길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으나 부사인 김성일은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서로 다른 보고를 합니다. 적절한 선에서 준비하고 한해를 보내게 됩니다. 1년 뒤인 1592년 일본은 20만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해왔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만을 양성해야할 만큼 대외적으로 위기상황이 아니라는 정치적 입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