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곡의 10만 양병설이 실패한 이유가 뭘까요?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이 실패한 이유가 뭘까요?
임진왜란전 이율곡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는데 결론적으로 실패했다고 하는데요
실패이유와 그때 10만양병이 성공했다면 임진왜란을 이겼을까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가는 항상 전쟁 준비를 갖춰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침 북쪽에서 여진족과 크고 작은 전투가 있던 터이라, 이이의 주장은 제법 진지하게 검토되었다고 합니다. 이이는 10만 군사를 길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자며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높으니 서둘러 전쟁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김성일은 침략 가능성이 높지 않다며 이에 반대하였다. 토론은 큰 성과 없이 끝났고, 조정에서는 급한 대로 몇 가지만 준비한 채 한 해를 보냈습니다.
1년 뒤 조총을 비롯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였다.(1592, 임진왜란) 20만이 넘는 대군이었습니다.
왜군의 수가 녹록하지는 않았지만 대비가 되었다면 해볼만한 싸움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조선 인구를 추정해보았을 때 군인 10만명이라는 숫자는 말도 안되는 숫자였습니다. 10만 명의 군대를 양성하고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는데 당시 조선 정부는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고, 10만 양병설을 위한 자금 조달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군인이 50만명인데 500만명으로 늘리자는 것과 마찬가지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10만을 양성했다면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피해가 좀 덜했긴 했을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 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서로 다른 주장으로 조정은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고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 또한 설로 떠돌다가 해를 넘기고 말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로서 상비군 10만을 유지하는것이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었고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
져 있던 정국에 협의점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율곡 이이가 너무 일찍 세상을 하직하여
동력을 잃었습니다.
제 답변이 도움이 되셨으면 좋아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