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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부적오함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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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도호부라는건 왜 옮겨갔나요?

대조영이라는 드라마를 보던중 당나라가 평양성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겼던데, 왜 옮기게 되었나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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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동도호부는 당나라 6도호부 중 하나로 당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고구려의 영토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누고 옛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합니다.

      그러나 신라가 이에 반발하며 나당전쟁이 발생하여 분노한 신리와 고구려 유민들이 연합하여 당나라군의 침략을 저지하였으며 이후 안동도호부는 신라에서 가까운 평양을 떠나 요동으로 치소를 옮기고 758년 안록산의 난으로 폐지되었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에 설치한 최고 군정 기관(軍政機關).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만주 지방으로 쫓겨났다가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경덕왕 15년(756)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68년 동북아시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고구려가 당과 신라의 연합 공격으로 멸망한 뒤 고구려 유민들은 당과 신라, 일본, 돌궐 등으로 흩어지게 된다.


      당은 먼저 평양성을 깨뜨리고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의 항복을 받은 후 고구려 영토에 대한 지배를 위해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전국을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편제하여 중국인 관리를 파견하고, 고구려인 중에서도 당군에 도움을 준 유공자들을 도독, 자사, 현령 등으로 임명해 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하지만 당의 의도와 달리 초창기부터 안동도호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669년 보장왕의 외손인 안승이 4,000여 호를 이끌며 신라로 넘어가고, 요동지역에 있었던 주요 성들 가운데 신성, 요동성, 안시성 등 상당수가 여전히 항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해 668년, 당은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 의지를 꺾고, 부흥 운동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지배층 및 부유하고 건강한 자들을 중심으로 28,000여 호를 뽑아 중국 내지로 옮겼다.


      그러나 이런 강압책은 오히려 반발을 불러왔고, 검모잠이 안승을 왕으로 옹립한 뒤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부흥 운동은 요동으로 번져 안시성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강제 사민의 여파로 불만에 가득 차 있던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에 강력하게 저항한 것이다.


      하지만 부흥 운동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인 후 신라로 달아나고, 671년 안시성이 함락되면서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 무렵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은 신라의 대당 투쟁과 결합되었는데 연달아 당군에 패하며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잦아들게 되었다.


      당은 유민들을 안무하기 위해 장안으로 끌고 갔던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왕에 봉하고 요동으로 돌려보냈다. 당인의 직접 통치 대신 고구려인을 전면에 내세워 고구려 유민을 간접통치하는 방식을 취해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가 겨우 안정되는 듯했지만 연남생이 679년 정월 29일 안동부 관사에서 병사하고, 보장왕이 680년 당의 의도와 달리 말갈족과 공모해 복국을 도모하는 등 고구려 유민 통치가 다시 불안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