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치 사상에서 통치는 천명에 근거합니다. 후산이 멸망한 뒤에도 사람들은 한 왕조를 여전히 정통으로 여겼고, 유씨 성을 가진 인물은 나세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유비는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을 자처하였습니다. 다만 매우 먼 방계였고, 아버지는 하급 관리에 그쳤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이 혈통이 별 실익을 주지 못했습니다.
결정적 계기는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세우자 상황이 달라진 것입니다. 유비는 이때 혈통을 명분으로 삼아 221년 한의 황제를 칭하며 촉한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219년 '한중왕'에 오른 것도 후한에서 왕작은 유씨만 반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