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광혜원은 어떤 성격의 기관이 있나요
1885년 서울에 광혜원이 설치 하였는데요 드라마 속에서 이름은 몇 번 들어 봤는데 좋은 의미인 것 같습니다만 광혜원은 어떤 성격과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혜원은
지금의 병원과 같은 기관이었습니다.
1885년에 한양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 의료 기관입니다. ‘광혜’란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뜻입니다.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조선의 제26대 임금인 고종에게 건의해 세워졌습니다.
광혜원은 문을 연 지 13일 만에 대중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혜원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 병원으로서, 의학적인 기능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가치도 높은 문화재입니다.
먼저, 광혜원은 조선시대 의학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광혜원은 의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건립된 병원으로, 조선시대 의학의 발전과 변천사를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또한, 광혜원은 조선시대 의학 사상과 실제 진료 방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됩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호러스 알렌은 미국의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서 상하이에서 활동하다가 1884년에 조선에 들어왔다.
당시 조선의 기독교는 선교에만 치중하던 천주교와는 달리, 교육과 의료 활동을 통해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선교 활동을 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알렌도 기독교의 이런 선교 방침에 따라 미국 공사관의 소속 의사로 일하면서 선교 활동을 했다.
알렌은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부상을 당한 민영익을 치료해 고종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고는 왕실의 의사이자 고종의 정치 고문으로 활동했다.
1885년에는 고종에게 근대식 병원을 세울 것을 제안했고, 이에 고종은 조선의 서민 치료 기관이었던 혜민서와 활인서를 없애는 대신 광혜원을 세웠다.
광혜원은 근대식 병원이자 의료 교육 기관으로 운영되었다. 1886년 3월에 16명의 학생을 뽑아 가르치기 시작했고, 알렌은 광혜원의 의사이면서 교수로 활동했다.
1904년에 미국의 사업가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새롭게 병원을 만들면서 광혜원은 세브란스 병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8 · 15 광복 후에는 세브란스 의과 대학이 되었다가, 다시 연희대학교와 통합되면서 연세대학교 의과 대학 부속 병원이 되었다.
출처 : 한국사 사전2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의료기관이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고종에게 건의해서 세워 졌고요, '광혜'란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입니다.
뒤에 대중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의 명에 의하여 1885년 4월 10일 개원한 최초의 서양식 왕립병원으로
설립 당시에는 명칭이 광혜원(廣惠院)이었습니다. 개원 13일만인 4월 23일 고종은 '대중(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중원(濟衆院)이란 이름을 하사하여, '광혜원'의 이름이 '제중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중원은 고종의 명에 의해 1885년 4월 10일 개원한 최초의 서양식 왕립병원으로 설립 당시에는 광혜원 이었습니다.
광혜원은 근대식 병원이자 의료교육기관으로 운영되었으며 1886년 3월 16명의 학생을 뽑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처음 명칭은 국립 광혜원(廣惠院)이었다.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고종과 조선 정부는 총체적인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의료 근대화도 구상하였다.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통해 서양식 병원을 탐색하고, 1884년 정부 신문인 『한성순보』의 사설을 통해 서양의학 교육기관의 설립과 양의(洋醫)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884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을 때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때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安蓮)이 우정국사건(郵征局事件) 당시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서양의술로 살림으로써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이 가속화되었다.
고종은 알렌의 서양식 병원건립 건의를 받아들여 1885년 2월 29일(음력)[4월 14일(양력)] 광혜원(House of Extended Grace)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곧 한성 재동주1에 설치된 국립병원이었다.
건물은 홍영식(洪英植)의 집(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을 쓰게 하였는데,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2주일 만에 백지화되고, 그 해 3월 12일(음력)[4월 26일(양력)]에 새로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원 당시부터 소급 적용하였다.
제중원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하루에 최고 70명의 환자를 보게 된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 환자의 수가 늘어나서 진료업무가 복잡하게 되자 알렌은 한때 미국 감리교회 선교의 스크랜턴(Scranton, W. B.)의 도움을 받기도 하다가, 곧 추가로 파견된 선교의 헤론(Heron, J. H.)과 함께 진료에 종사하였다.
1886년에는 다시 미국으로부터 여의(女醫) 엘러스(Elless, A. J.)가 파견되어 제중원에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고 여인들의 진료에 종사하였다.
이렇게 제중원의 진료업무가 더욱 번창하자 1887년 초 조선 정부는 한성 남부 동현의 왕실 소유 부지(지금의 을지로 입구와 2가의 중간, 구 한국외환은행 본점 자리)로 제중원을 옮겼다.
1887년 가을 알렌이 미국특파전권대사 박정양(朴定陽)의 수행원으로 떠나게 되자 제중원의 진료업무는 헤론이 전담하게 되었고, 부인부의 여의는 엘러스가 혼인하게 됨에 따라 호르톤(Horton, L. S.)으로 교체되었다.
그 뒤 알렌이 돌아왔으나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었으므로 병원진료는 하지 않았고, 1890년 여름 헤론이 병사하자 캐나다에서 다시 파견된 빈턴(Vinton, C. C.)이 의료업무를 이어 맡다가 1893년 다시 추가로 파견된 에비슨(Avison, O. R., 魚丕信)에게 인계되었다.
제중원은 1885년 국립병원으로 개원하여 진료활동을 한 이래, 1894년 6월 갑오개혁의 행정관제개혁 때 내무아문 아래 위생국(衛生局)을 설치하여 종두(種痘)주2 및 의약 · 전염병예방업무 등을 맡게 하면서 7월 18일 내무아문으로 폐합되었다.
이후 에비슨은 병원 운영을 맡은 관리들의 부패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어 정부에 쇄신을 건의하였다.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권리를 에비슨에게 맡겨 설립한 지 9년 만에 경영권도 완전히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Severance, L. H.)의 재정지원으로 1904년에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로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고 세브란스병원이라 하였다. 에비슨에 의하여 1899년 제중원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편되면서 제중원이라는 이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1886년 3월 29일, 서양의학을 교육하고 양의(洋醫)를 양성하기 위한 국립 제중원의학당이 개교했다. 아울러 1886년 5월 미국 의사들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알렌과 헤론에게 당상관(堂上官)의 벼슬이 하사되었다.
조선 정부는 건물과 예산을 제공하고 학생들을 선발했으며, 제중원 의사 알렌은 교수들을 섭외하고 교육에 필요한 의학도구 등을 준비했다. 본과 학생은 12명이었으며 영어, 화학, 해부, 약 조제법 등을 배웠다.
그러나 제중원의학당에서 정식 졸업생은 단 한 명도 배출되지 못했고, 1893년 에비슨이 내한하면서 의학교육이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