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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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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의료기관 광혜원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요.

고종 때 설립된 광혜원은 선교사가 지었다고 알고있는데요.

선교사가 의료기관을 지을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광혜원에서는 일반 백성들도 치료를 받을 수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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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혜원은 미국 선교사인 호러스 알렌음 고종의 윤허를 받아 1885년 2월 29일 서울 재동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입니다.

    광혜원의 설립에는 당시 구한말의 역사적 배경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알렌은 갑신정변 때 칼을 맞아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해 생명을 구해주었습니다. 서양의학의 효과를 입증한 이 일을 계기로 조선에서는 서양 의술이 폭발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합니다.

    곧이어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된 그는 고종에게 근대식 병원을 설립할 것을 건의하였고, 고종이 이를 윤허하여 설립된 것이 광혜원이라고합니다.

    ‘광혜’는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뜻으로서 일반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의료기관으로 기록되고있습니다.

    같은 해 3월 12일 광혜원은 더 많은 백성들에게 널리 혜택을 주자는 취지 아래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꾼 후, 왕실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진료하는 기관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중원은 개원 이래 첫 1년 동안 10,46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양반층은 주로 왕진을 요청했으며, 지방에서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도 적지 않았다. 치료받은 환자들의 주요 질환을 살펴보면, 말라리아가 가장 많았다.

  • 호러스 알렌은 미국의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상하이에서 활동하다가

    1884년에 조선에 들어와서 미국 공사관의 소속 의사로 일하면서 선교활동을 한 인물입니다.

    알렌이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부상 당한 민영익을 치료하면서

    고종의 신임을 얻었고, 왕실의 의사이며,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1885년 고종에게 근대식 병원 설립을 제안하고 설립한 것이 광혜원입니다.

    광혜원에서 제중원으로 이름을 변경합니다.

    일반 백성들도 치료 받을 수 있는 이름이 제중원입니다.

    1904년 미국의 사업가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새롭게 병원을 증축하면서 제중원이

    세브란스병원으로 부르다가 8.15 광복 후에는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다시 연희대학교와 통합되었고, 연세대학 의과대학 부속 병원이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고종과 명성황후의 인척이자 측근이었던 민영익은 개화파 자객에게 피습당해 13번 칼에 찔려 중태에 빠지고 이때 묄렌도르프가 미국인 선교사 의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을 고종에게 추천했고, 알렌으로부터 서양 의술로 치료받은 민영익은 목숨을 구하고 소생합니다.

    이에 감복한 고종은 알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비단 옷과 부채, 도자기 등을 선물하는데 이 때 알렌은 고종에서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의하게 되었습니다.

    설립 당시 왕립병원으로 광혜원이었고, 대중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제중원 이란 이름을 하사해 제중원이 됩니다.

    조선인 환자도 받았으나 명목상으론 조선땅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기타 외국인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 1885년 알렌의 건의로 세워집니다.

    이름 근대로 널리 은혜를 베푼다 입니다.

    2주 뒤 "제중원"으로 바뀌는데, 대중을 구제한다 의미로 일반 백성들도 치료 가능했습니다.

    아마도 1882년 미국과 개항으로 인해 그 일환으로 미국이 조선의 환심을 얻고자 지은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