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예의 책화와 족외혼에 대해 질문드려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동예는 산과 강을 중시하는 습속이 있어 여러 읍락이 산과 강을 경계로 나누어있으며 함부로 다른 읍락의 영역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만약 함부로 경계를 침범하는 일이 발생하면 벌로 사람과 소, 말을 바치게했는데 이를 책화라 합니다.
동예 사회의 모습도 여러 읍락이 서로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엄밀히 분리되어있음을 보여주며 산천은 수렵과 채집 및 어로 활동의 중요한 터전이므로 이를 구분해 서로 침범하지 않았다는 것은 경제활동의 단위가 읍락으로 제한되어있음을 의미합니다.
읍락 내부의 결속과 유대는 강하고 읍락이 점유한 산천은 소수의 읍락민이 독점 , 과점하기 보다 다수의 읍락민이 공유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옥저는 지금의 함흥을 중심으로 함경도 일대에 걸치고, 동예는 그 남쪽에 접하고 있었으니, 이 지방은 멀리 동해안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문화와 사회가 뒤늦고, 따라서 왕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 국가를 만들지 못하여, 마을마다 우두머리가 있어서 마을을 다스려 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옥저와 동예는 그 나라로 힘이 모여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식량을 얻고자 쳐들어오는 고구려를 막아내지 못하고, 그에 복속되어 해마다 많은 물자를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옥저는 농작물이 매우 잘 되고, 생선, 소금 등 해산물도 풍부하였으나, 항상 고구려의 경제적 착취에 시달려 군색한 살림살이를 면하지 못했고, 따라서 사회의 발전은 막히게 되었습니다. 옥저인의 음식, 거처, 옷차림 및 예절 등의 풍속은 대개 고구려와 비슷하였으나, 다만 고구려의 데릴사위 제도에 대하여 옥저에는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습니다.
동예는 농업 사회로서 주로 농사를 짓는 한 편, 누에를 치고 길쌈이 성하였으며, 별을 관측하여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또한 여기서도 10월에는 1년의 추수를 감사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불렀으며, 이것은 우리 조상들의 공통적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