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은 왜 종의 기원을 20년 넘게 미루다가 뒤늦게 출판했나요?

다윈이 진화론 아이디어를 오랫동안 발전시켰으면서도 출판을 미뤘다고 배우는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 주저하다가 결국 책을 내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한두번도아닌데그대를만날때면님. 이중철 전문가입니다.

    먼저, 찰스 다윈이 자연선택설을 착상하고도 종의 기원 출판을 미 이유는 당시 영국의 종교적 질서와 사회적 비난에 맞서기 위해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과학적 증거를 모으려 했기 때문이며, 최종 결단을 내리게 된 계기는 앨프리드 월리스의 편지가 결정적이었답니다.

    ■ 창조론 중심 사회의 거센 반발과 심리적 압박

    ​19세기 영국은 신이 모든 생명체를 창조했다는 믿음이 확고했기에, 생물이 진화한다는 주장은 신성을 모독하는 위험한 이단으로 낙인찍힐 수 있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적이 있고 독실한 신자인 아내를 둔 다윈은, 진화론을 발표했을 때 학계에서 매장당하거나 가족이 겪을 고통을 크게 두려워했거든요. 동료에게 자신의 이론을 털어놓으며 마치 살인을 자백하는 기분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극심한 사회적 압박감 속에서 침묵을 지켰던 것이지요.

    ■ 치밀한 실증 자료 축적과 월리스의 등장

    ​다윈은 비난을 극복할 유일한 무기가 완벽한 증거뿐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에 따라 따개비 연구에 8년을 쏟고 비둘기 품종 개량과 식물 분포를 집요하게 조사하며 방대한 실증 자료를 축적했는데요. 그러던 1858년, 젊은 박물학자 앨프리드 월리스가 자신과 거의 같은 자연선택설 논문을 편지로 보내오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평생의 연구 성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자 다윈은 마침내 주저함을 털어내고 1859년 종의 기원을 세상에 전격 출간했던 것이랍니다.

    ​정리하자면,

    다윈은 사회적 종교적 비난에 맞서기 위해 20여 년간 치밀하게 과학적 증거를 모으며 출판을 주저했으나, 동일한 이론을 세운 월리스의 편지를 계기로 연구의 우선권을 지키기 위해 비로소 종의 기원을 세상에 발표하게 되었답니다.

    ※ 질문자님을 포함하여 소중한 분들의 건강, 재산과 안전을 지키고, 혹시나 발생할 수 있을 다양한 문제 상황에 놓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를 포함하여 다양한 토픽에서 활동하는 모든 전문가분들의 아하 지식커뮤니티에서의 답변은 예외 없이 참고 용도로만 유용하게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채택 보상으로 158베리 받았어요.

    채택된 답변
  • 당시 사회 통념상 종교적, 사회적 반발에 대한 두려움과 다윈 성격상 신중한 과학적 완벽주의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다윈이 살던 당시는 창조론 중심의 영국 사회였기에 자칫 진화론 발표는 신성모독이자 사회적 매장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다윈의 아내 에마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에, 자신의 이론이 아내에게 고통이 될까 염려했습니다.

    그리고 다윈 자신도 반론을 완벽히 방어하고자 8년간 따개비 연구와 비둘기 사육, 식물 실험 등으로 반론에 대응하기 위 증거를 수집했는데, 실제 1844년 익명으로 출판된 진화 관련 서적이 거센 사회적 비난을 받는 것을 보고 더욱 신중해졌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1858년, 젊은 학자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가 자신과 동일한 자연선택설 논문을 보냈는데, 해당 내용은 다윈이 20년간 연구해 온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와 같은 내용들이었기에, 자칫 20년 연구의 독창성을 잃을 위기가 될 수 있어 동료 과학자들의 조언을 받아 논문을 공동 발표한 것입니다.

    결국 월리스라는 경쟁자가 없었다면, 다윈의 완벽주의 성향상 '종의 기원'의 출판은 훨씬 더 늦어졌거나 사후에 발표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 안녕하세요. 임형준 수의사입니다.

    다윈이 출판을 미룬 이유는 단순히 종교적 비판이 두려워서 라기보다, 자연선택 이론을 뒷받침할 충분한 증거를 수집하고 반론까지 검토하려 했기 때문으로 봅니다. 그는 1830~40년대에 핵심 생각을 정리했지만 연구를 계속했고, 1858년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비슷한 자연선택 이론을 보내오자 공동 발표한 뒤 1859년 종의 기원을 출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