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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23.06.21

중국 문화혁명의 주요 내용은 무엇입니까

중국 공산당 정부가 실시한 중국의 문화혁명은 주로 무엇을 혁명한다는 내용인지 그 핵심내용이 궁금하고 결과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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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은 1965년 요문원의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1959년 6월 북경시 부시장인 오함은 〈인민일보〉에 '해서, 황제를 꾸짖다'라는 비유적인 수필을 발표한 후, 곧이어 '해서파관'이라는 극본을 써서 1961년 베이징에서 공연하였다. 명나라의 관리인 해서는 "당신은 너무 독단적입니다. 당신은 지나친 편견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고 비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당신에게 불만을 품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라고 읊조린다. 팽덕회가 떠올려지는 장면이며, 그를 파면한 황제는 모택동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일 것이다.

    첫 공연 당시에 모택동도 해서의 자세를 배워야한다고 했던 이 공연이 새삼스레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당시 당권에서 비켜서 있으나 당 외의 대중들에게 엄청난 카리스마를 갖고 있던 모택동은 당권을 차지하고 있던 류소기 등 온건 세력을 '반혁명 수정주의 세력' '우리 곁에 잠자고 있는 흐루쇼프와 같은 인물들',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권파', '인민공사를 파괴하고 지주와 부농의 지배를 재건하려는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대중이 일어나 당권파와 낡은 사회를 타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대중이란 청소년이었고 노동자였고 군대였다. 대중을 동원하여 정상적인 절차를 배제하고 이루어진 당권경쟁은 중국을 혼돈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질서의 파국으로 이끌었다. 폭력은 반대세력의 또 다른 폭력을 불러와 중국은 내전의 상황에 돌입하였다. 합법적 권력기구들이 무력화되면서 무정부상태가 되고 일반 범죄까지 가중되는 폭력적인 광기가 중국 사회를 휩쓸었다.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본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으로, 모택동에 대한 개인적인 숭배를 조장하는 세력들과 당권을 되찾아 혁명의 원칙을 지켜내고 과업을 완수하고자 하는 모택동의 조급하고 유토피아적인 의지가 결합되어 나타났다. 무산계급인 인민으로부터 임의로 그들의 적으로 규정된 무수한 사람들에게 무차별적 공격이 시작되었다. 계급의 적으로 몰린 수많은 과거의 혁명 영웅, 전문가, 학자, 민주인사와 군중이 수시로 학대와 고문, 혹형 등으로 처참하게 희생되었다. 정치혁명이나 경제혁명과 달리, 문화혁명은 인간의 의식을 개조하여 혁명을 완성한다는 것이기에 더욱 자의적이고 근본적이며 과격한 형식을 띄게 되었다.

    문화혁명의 전조로 1962년부터 시작된 사회교육 운동이 있었다. '대중에 의한 당의 통제, 위계질서의 제거,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결합, 새로운 인간과 혁명 사업 계승자의 육성' 등의 과제는 그대로 문화혁명의 지향점이었다. 사회교육 운동은 실패했으나 인민혁명군 내에 충성스런 추종자들을 만들었다. 모택동은 당은 수정주의자가 되었지만, 군은 혁명의 순수성을 보존하여 '연안 정신'을 다시 소생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인민해방군 내에서 모택동 개인숭배사상이 자라났다. 임표(린바오)는 1964년 5월 모택동 어록의 초판을 발행하였다. 이 유명한 작은 붉은 책(소홍서, 소홍보서)은 그 뒤 몇 년간 약 10억 부가 발행되었다. 서론에서 임표는 모택동 사상을 '고갈되지 않는 힘의 원천이며 무한한 힘을 가진 정신적인 원자탄'이라고 썼다. 그는 혁명의 과정에서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반란을 부추기는 모택동의 호소에 맨 처음 귀를 기울인 것은 북경의 대학생들이었다. 5월 25일 젊은 철학 교수인 섭원제(녜위안쯔)는 대자보를 통해 북경대학장을 비판했다. 모택동은 그 교수를 지지하고 완전한 새로운 형태의 국가 권력의 출현을 선언했다. 대중 동원이 대학과 중고등학교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파괴 없이는 건설도 없다', '모든 악귀를 쓸어버리자'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학교에서 만들어진 급진적 그룹들로부터 이른바 홍위병이 탄생한 것이다.

    홍위병은 대부분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다. 이들이 낡은 기존의 사회를 타파하고 사람들을 사회주의적 인간으로 개조하는 문화대혁명의 선봉에 서게 된 것이다. 모택동은 자신이 직접 쓴 '사령부를 폭격하라'는 대자보를 통해 홍위병에게 당에 대한 투쟁을 위임하고 임표와 인민해방군에게 젊은 조반(반란)파가 조직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그가 대중과 청년들에 대한 신뢰로부터 청년들이 영웅적인 혁명의 시대와 단절되지 않고 혁명적 열정을 생생히 간직하는 혁명의 계승자가 되기를 기원했다고 하더라도,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청소년들은 아무런 신중한 조처 없이 내던져져 커다란 상처를 받게 되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반적으로 협의로는 1966~1968년 또는 1969년의 중국에서 일어난 주로 파괴적인, 비판, 규탄, 투쟁, 숙청의 과정을 가리키고, 광의로는 중국에서 ‘문화의 10년’이라고 하여 1966년부터 모택동이 서거한 후 이른바 ‘4인조’가 체포된 1976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광의의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다룬다.


    문화대혁명의 성격을 간단하게 서술하면 중국 공산당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에 대한 모택동의 당 외(外) 대중을 동원한 투쟁과 그것에 승리한 후의 모택동 이념에 선 독특한 정책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권력투쟁ㆍ정책투쟁이 발생한 원인은 국제적으로는 1956년의 소련 공산당 제20회 당 대회에서의 스탈린 비판에 기인하며, 중국 지도부에 있어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 정책적 정당성’ 그리고 그 구체화로서 스탈린 지배에 요구하였던 혁명정권의 정통성 근거를 흔든 것이었던 것, 모택동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에 대한 개인숭배에 뿌리를 둔 그의 권력기반을 위태롭게 한 것에 기인한다. 동유럽의 동란이 이 위기를 구체적으로 나타내었다. 국내적으로는 모택동의 건설보다 혁명을 중시하는 성향, 중국 공산당 전체적인 흐름이지만 특히 모택동의 경우 현저하였던 사회주의를 조기에 실현하고자 하는 초조함 등이 존재하였다. 중국 공산당 특히 모택동은 이 정통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흐루쇼프 이후의 소련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중국 독자의’ 그리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정통을 계승한 새로운 이데올로기ㆍ정책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도의 결과는 국제적으로는 중소 대립을, 국내적으로는 ‘대약진’, ‘인민공사(人民公社)’와 같은 정책의 실패와 2, 000만 명에 이르는 기아를 낳는 참상을 초래하였다. 모택동에게 주요책임이 있는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당 중앙은 나중의 ‘개혁개방’과도 통하는 조정정책을 채용하여 붕괴된 중국경제를 다시 세웠으나, 이 사이에 전통적인 미신의 부활과 소련의 ‘수정주의’와 같은 정책과 현상이 발생함으로써 모택동은 이것에 강한 불만과 위기감을 안고 있었다.

    그 결과 모택동은 임표(林彪)가 이끄는 군과 모택동의 부인인 강청(江靑)이 의거하는 상해그룹을 중심으로 반격을 개시하였다. 모택동은 당 중앙의 주류파를 ‘당내의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라고 하여 타도의 대상으로 하였다. 그때 모택동이 이용한 것은 당 외의 대중, 특히 청년 학생을 중심으로 한 ‘홍위병(紅衛兵)’이었다. 이 당 외의 대중이 모택동의 호소에 호응한 것은 단지 모택동에 대한 맹목적인 개인숭배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명확하지 않은 문화대혁명의 이면에 1950년대이래 스탈린적 사회주의의 특권계층체제, 경직된 계획경제 등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개혁 개방’이 개시된 후에도 1950년대, 특히 1956년 이전의 ‘황금시대’로 복귀되어야 한다는 관점이 강하였지만 그것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오늘날에도 ‘고급간부’ 및 그 자녀의ㆍ부패ㆍ오직(汚職)과 같은 ‘개혁’에 의해 수반되는 측면에 나타나있다.


    현실의 문화대혁명은 1956년 말에 종래의 대약진을 비판하여 실각한 팽덕회(彭徳懷)의 명예회복을 도모한 문예에 대한 비판이라는 형태를 취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고, 이와 같은 움직임을 둘러싼 모택동 등과 당 중앙의 주도권 쟁탈 후에 1966년 5월 16일의 ‘5.16’ 통지 이후 모택동 주도의 파괴단계의 문혁(文革)이 본격화한 것이다. 문혁 이념은 한 마디로 ‘파리 코뮌’의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며 이것에 호응한 홍위병 등의 ‘조반(造反)’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실권파’에 대해서 ‘초법규적’인 체포감금이 이루어지거나 또한 일반민중도 외국관계의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 스파이 취급을 당하는 등 전체중국을 공포에 빠뜨렸다. 그러나 유소기(劉少奇), 등소평을 비롯한 주요 ‘실권파’가 추방되고 건설의 단계에 들어가자 홍위병은 농촌으로 내려가 이 사람들 속에서 후에 민주화운동을 책임질 사람들을 배출한다. 이 시기에 각지의 통치기관으로서 ‘혁명적’ 군ㆍ대중ㆍ간부의 3결합의 ‘혁명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것들은 개혁노선이 개시된 후에는 각급 정부로 탈바꿈된다. 이 사이에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임표는 미중 접근에 반대하고 또한 권력의 확립을 위해 책모(策謀)하다가 그것이 폭로되어 도망 중에 사고사(事故死)한다. 문혁 후기에는 이데올로기 중시, 경제발전ㆍ생산력 향상경시, 경제활동에 있어서 물질자극보다 정신 자극 중시를 의미하는 문혁(文革)이념에 기초한 ‘문혁파’와 경제건설 중시의 주은래와 부활한 등소평의 경제우선노선간에 암투가 계속된다. 이 투쟁은 1976년 모택동의 죽음과 ‘4인조’의 체포로 막을 내리고 실권을 장악한 등소평 하에서 개혁과 개방으로 이행하는 결과가 되었다.

    출처 : 21세기 정치학대사전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문화 혁명(文化革命)" 또는 더 줄여서 "문혁(文革)"이라고도 합니다 원래 내세운 목표는 파사구(破四舊)라 하여,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을 타파(打破)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적인 이타주의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하자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저 역사적인 문화 검열 사건이자, 전국 단위로 실행된 대규모 반달리즘이 됐을 뿐입니다. 주요 골자는 옛 것은 모조리 숙청하는데 문화, 교육, 정치, 가족 등 모든 것을 의미 했습니다. 중국이란 넓고 오래된 나라에서 전국 규모로 일어난 이 사건의 이름은 문화'대혁명'이지만 그 실상은 문화 대숙청문화 대파괴였습니다. 그 결과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 하게 되었고 경제 후퇴, 문화 파괴, 교육의 황폐화, 사회 질서의 문란 등을 남기고 허무하게 ㄲㅌ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화 대혁명의 형식상 표면에 내세운 구실은 "회생하려는 전근대성 문화와 시장 정책 문화를 비판하고 더욱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를 창출하자!"라는 정치·사회·사상·문화 개혁 운동이었지만, 실질로는 대약진 운동이 크게 실패한 탓에 정권 중추에서 잠시 물러난 마오쩌둥이 자신의 재부상을 획책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민중과 학생 폭력 운동을 동원해 시장 회생파를 공격하고 죽이려고 몰아간 마오쩌둥파와 덩샤오핑파 간의 권력 투쟁을 겸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