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충칭으로 이동한 임시정부 활동 양상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김구와 지청천, 조소앙 등 주요 인물이 합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충칭까지 이동하여 임시 정부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가고요. 1940년대 충칭으로 이동한 임시정부 활동 양상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충칭 시대(1940~1945)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건국강령 발표
충칭에 자리한 임시정부는 우선 한국광복군 창설에 주력하였다. 1940년 5월에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에 「한국광복군편련계획대강」이라는 계획서를 제출하였다. 한중연합군으로 연합 작전을 펴기 위해 한국광복군을 편성하는 것을 양해하고 그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중국 군사위원회는 광복군과 중국군은 위상이 다르다며 연합작전 제안을 문제 삼았다. 임시정부는 독자적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기로 결정하고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를 조직하고 창군 계획을 마련하였다. 1940년 9월 15일에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창설을 선포하고 이틀 후인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려 하였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1941년 11월 중국 군사위원회의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한국광복군은 군비 · 재정 · 훈련 등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부대의 편제와 병력의 규모, 부대의 지휘와 운영 등은 중국의 지휘를 받아야만 하였다. 중국 군사위원회가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의 취소를 통보한 것은 1944년 8월이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에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국정에 반영한 「건국강령」을 발표하고 1941년 12월에 아시아태평양전쟁주13이 일어나자 즉각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것이다.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는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전후 처리에서 연합국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조치였다. 1945년 2월 28일에는 독일에도 선전 포고를 하였다.
임시정부는 1944년 중국공산당 지역인 화베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만주의 항일 빨치산주14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하였다.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화북조선독립동맹은 1945년 4월에 충칭에서 열리는 해외 항일조직 대표회의에 장건상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이충모는 만주 항일 빨치산이 소련으로 넘어가 88국제여단에 소속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김구의 신임장을 갖고 그들을 만나고자 만주로 가던 루트를 확보하던 중에 광복을 맞았다.
좌우합작정부 구성
충칭으로 이동한 임시정부는 당정 체제를 확립하였다. 1940년 5월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3당이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이어 9월에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고, 10월에는 국무위원제에서 주석제로 개헌을 단행하여 김구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이라는 당 · 정 · 군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한편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좌파 세력은 임시정부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 국민당 정부가 좌우합작을 권유하면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 창구를 일원화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러자 좌파에서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하였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1941년 12월 「옹호임시정부선언」을 발표하고 임시정부로 통일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하였다.
이 무렵 조선민족혁명당 관할 아래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원 상당수가 중국공산당 지역인 화베이 지역으로 이동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일부와 한국광복군 간의 군사적 통일이 이루어졌고 이어 정치적 통일이 추진되었다.
정치적 통일은 좌파 인사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하는 형식을 띠었다. 임시의정원은 좌파 인사들을 참여시키기 위하여 의원 선거 규정을 개정하였다. 1942년 10월에 실시된 의원 선거를 통해 한국독립당 소속 의원 29명, 좌파와 무소속 의원 17명으로 좌우연합에 의한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었다.
임시의정원이 좌우합작의 ‘통일의회’가 되면서 의정원 운영이 달라졌다. 여당과 야당이 존재하는 다당제 의회가 되었다. 회의에서는 종종 양자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야당들은 1941년에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발표한 「건국강령」주15을 수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건국강령」이 임시의정원을 통과한 입법이 아니라 국무위원회가 선포한 행정부 강령이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1943년에 열린 제3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건국강령」 수정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여 「건국강령」을 입법화하려 하였으나 결국 불발에 그쳤다.
1944년 4월 제36회 의정원 회의가 개최될 때에는 여야가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한국독립당 25명, 조선민족혁명당 12명, 조선민족해방동맹 3명, 무정부주의자연맹 2명, 통일동맹 1명, 무소속 7명이었다. 이 회의에서 임시정부의 마지막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하였다. 이때 개헌은 야당 의원들이 요구한 것으로 좌우익을 망라한 독립운동 정당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룬 최초의 ‘정치적 합의 개헌’이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근간으로 임시정부도 좌우연합 정부로 꾸려졌다. 김구 주석은 한국독립당, 김규식 부주석은 조선민족혁명당 소속이었다. 국무위원 14명도 한국독립당 8명, 조선민족혁명당 4명, 조선민족해방동맹 1명, 조선혁명자연맹 1명 등으로 배분되었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정부로서 해방을 맞았다.
임시정부의 승인 외교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계 각국의 승인이 필요하였다. 임시정부가 승인을 요청할 우선 대상자는 임시정부가 자리한 중국이었다. 임시정부의 국제법상 승인에는 무엇보다 소재지 국가의 승인이 절대 조건이었다.
1940년에 임시정부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좇아 충칭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승인 외교를 펼쳤다. 먼저 미국을 상대로 승인 외교를 펼쳤다. 1941년 2월에 김구 주석은 미국 루스벨트(F. D. Roosevelt)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그해 6월에도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이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C. Hull)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고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대미 승인 외교를 강화하였다.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위원장에 임명하는 신임장을 발송하고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에게 주미외교위원부를 설립하고 이승만을 공식 외교사절로 임명하여 전권을 위임하였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승만은 신임장을 받자 곧바로 이를 미국 국무부에 제출하였다. 하지만 국무부는 전후 조선의 독립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정리되고 중국 · 소련 · 영국 등 다른 연합국의 태도가 확정될 때까지는 이승만의 신임장을 접수하지 않기로 방침을 세웠다.
중국에서는 국민당 정부가 먼저 1941년 10월에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꺼냈다. 외교부장 궈타이치가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 창구를 임시정부로 일원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는 동시에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국무회의에 제출하고 영국 · 미국 정부와 협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여기에는 독립운동세력 내 좌익 진영도 임시정부에 참여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달렸다.
임시정부는 즉각 좌우합작 방안을 마련하고 중국 정부에는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였다. 1942년 1월에는 김구가 장제스에게 "중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은 두 나라 간 역사적이고 도의적인 이해득실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승인받지 못하고 있음은 매우 유감스럽다"는 내용을 담은 외교문서를 보내 조속한 승인을 촉구하였다.
1942년 3월 1일 3 · 1운동 23주년 기념일을 맞아 임시정부는 충칭과 워싱턴에서 각각 임시정부 승인 촉구 집회를 열었다. 충칭에서 열린 기념대회에서는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동시에 임시정부가 대일 교전국의 일원으로 참전하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워싱턴에서 열린 대한인자유대회에서는 주미외교위원부, 재미한족연합회, 한미협회 명의로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 무렵 쑨원의 아들이자 입법원 원장인 쑨커가 임시정부 승인을 거듭 주장하는 등 임시정부 승인 문제가 중국에서 공론화되는 가운데 국민당 정부가 연합국에 임시정부의 승인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한반도의 전후 처리 방안으로 국제 공동 관리, 즉 신탁통치주16를 선택하면서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결국 외교 마찰을 우려한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 승인을 유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향해 달리면서 임시정부의 승인 외교는 더욱 급박해졌다. 1944년 6월 17일 외무부장 조소앙은 미국 국무장관 헐에게 공문을 보내 다시 한 번 연합국을 이끌고 있는 미국이 빠른 시일 안에 임시정부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7월 3일에는 김구 주석을 비롯한 각료 전원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공문을 장제스에게 보내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전후 처리에 있어 합법적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임시정부의 끈질긴 외교 노력을 보여주었다. 국민당 정부는 미국과 여러 차례 교섭을 벌였으나,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입장이 분명하므로 단독으로 승인하기는 어렵다는 답을 보내왔다.
임시정부의 승인 외교는 전후 처리에 있어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신탁통치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모색의 일환이었다. 해방 직후 임시정부는 「당면정책」을 발표하여 임시정부가 국내로 들어가 과도 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정부 역할을 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를 거부하였고,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하였다. 승인 문제가 헌법 체계를 갖추고 20년이 넘게 명맥을 유지하였던 임시정부의 운명을 갈랐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시정부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충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국 내의 마지막 청사 위치로 1940년 9월부터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까지 머물렀다. 1937년 발생한 중일전쟁 전후의 영향으로 1932년부터 상하이시에 있던 소재지를 항저우시, 자싱 시, 난징시, 창사 시, 광저우시로 옮겼고 중국국민당 정부의 도움으로 1940년 중국 내에서 마지막으로 이 곳으로 옮기게 된다.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석판가ㆍ양류가ㆍ오사야항의 3곳에 청사 건물을 두어 사용하였고 마지막으로 1945년 1월부터 8월까지 이곳 연화지 청사를 사용하였다. 임시정부는 충칭에 머물며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는 등 활발한 독립 운동을 펼쳤다.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