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왜 당시 조정에서 논란이 됐나요?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펼쳤다고 배우는데, 이게 왜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서 비판받았는지, 결국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조선의 건국 이념과 통치 질서인 성리학적 명분론을 위배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인조 반정의 요인이 된 것입니다. 광해군이 명나라와 새로 뜨는 후금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시행했습니다. 예를 들어 1619년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원군으로 파견된 강홍립에게 지시한 명령(후금에 항복)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광해군은 이와 같은 중립외교를 시행한 이유는 임진왜란 이후 명은 이미 국력이 쇄락하고 있었으나 후금은 명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서인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우선 명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한 '재조지은'의 국가를 배신하는 것이라 판단했던 것입니다. 또한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오랑캐 후금과 친선을 하는 것은 유교적 명분에도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외교는 실리보다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신념에 입각해야 한다는 논리로 비판한 것입니다.

    결국 서인과 일부 남인들이 성리학적 명분론에 어긋난 중립외교와 광해군에게 '폐모살제'의 폐륜 행위를 비판하며 1623년 인조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페위시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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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택된 답변
  • 안녕하세요. 권기헌 전문가입니다.

    당시는 명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왜란에서 명나라가 리스크를 안고 참전을 해주었기에, 망할뻔한 조선을 지켜준게 명나라라고 생각했던 대신들에게 있어서 중립외교는 부모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으니 반대를 한 것이죠. 하지만 결국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 막강했던 청에게 삼전도굴욕을 당하는 결과가 기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