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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2

이선장의 옥이 무슨사건인가요???

안녕하세요.

옛날에 있었던 이선장의 옥 이라는게 무슨 사건인가요?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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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호람의 옥(胡藍-獄) 혹은 호람안(胡藍案)은 명나라 때인 1380년(홍무 13년) 재상 호유용의 모반 계획을 계기로 일어난 숙청 사건인 호유용의 옥(胡惟庸-獄) 혹은 호유용안(胡惟庸案)과 1393년(홍무 26년) 장군 남옥(藍玉)에 대한 숙청 사건인 남옥의 옥(藍玉-獄) 혹은 남옥안(藍玉案)을 아울러 일컫는 것으로 홍무제의 치세 후기의 공포 정치를 상징하는 사건들이다. 두 사건 모두 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고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두 사건 외에도 1376년(홍무 9년)에 있었던 공인(空印)의 안, 1385년(홍무 18년)에 있었던 곽환(郭桓)의 안을 합쳐 명초4안(明初四案) 혹은 홍무4안이라고도 한다. 또 호유용의 옥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 임현 사건과 이선장(李善長)의 옥인데 이를 구분해서 포함하기도 한다. 어느 사건이든 홍무제가 주도한 대숙청이란 점에서 차이는 없다.

    호유용과 남옥은 모반을 계획했다가 그 전에 발각된 사건이었고 공인의 안이나 곽환의 안은 관리들의 부정을 추궁하다가 발생한 사건인데 어느 것이든 제대로 된 조사도 거의 없이 관련되었다고 의심받은 사람들이 즉결처분을 받았다. 조사 결과 자체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만 홍무제에 의한 날조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며 황제 독재 체제를 꿈꾸던 홍무제가 공신들을 숙청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홍무제는 금릉을 거점으로 삼아 세력을 확장했고 강남 출신 지주와 지식인을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따라서 신생 명나라 정권에는 강남 출신 관료가 많았고 홍무제는 이들의 권익과 세력을 억제하고자 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거기에 홍무제와 동향인 안후이성 출신 측근들도 건국공신이 되어 사리사욕을 채우고 군사적으로 황제권을 위협할 만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결국 황제권의 강화를 꿈꾸던 홍무제는 이들을 무력으로 숙청하면서 뜻을 이루고자 했던 셈이다. 청나라 때의 고증학자인 조익은 『이십이사차기』를 통해 "그 잔인함은 실로 천고에 유례가 없었다"고 평했다.

    호유용의 옥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음에도 여전히 은밀하게 세력을 유지하는 관료들은 남아 있었고 홍무제는 이들도 숙청할 필요를 느꼈다. 1385년 군공제일(軍功第一)로 불리던 서달이 종기가 악화돼 걷는 데 지장이 생기게 되었다. 홍무제는 찐 거위를 하사했는데 거위고기는 종기를 앓는 사람에겐 독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홍무제의 뜻을 눈치챈 서달은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먹었고 며칠 뒤 사망했다. 1375년 요영충, 1380년 주양조, 1384년 호미가 처형되었고 심지어 친조카인 주문정조차도 사소한 죄를 물어 죽여버렸다. 남아 있던 공신들은 언제 자신도 홍무제의 숙청 대상이 될지 두려워했고 그 타겟은 초대 좌승상을 맡았던 이선장(李善長)이 되었다. 이선장은 호유용과 인척 관계이며 개국 2등공신이었지만 홍무제의 딸 임안공주가 이선장의 아들 이기에게 시집을 갔기에 홍무제로서도 일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1390년(홍무 23년) 이선장의 동생 이존의가 과거 호유용이 모반 계획을 꾸밀 때 협력했단 이유로 체포되었고 조사 과정에서 이선장도 이 사실을 알면서 묵인했단 사실이 드러났다. 홍무제는 이선장이 역모와 관련이 있다는 보고를 받자 격노했고 즉시 이선장에게 자결을 명했다. 이후 이선장의 일족 70여 명도 모조리 죽여버렸다. 곧이어 호유용의 당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어 육중형·비취·당승종·조용·정우춘·황빈·육취·모기·이백승·등진 등 19명의 공신이 변명 한 번 허락받지 못한 채 즉시 처형당했다. 또한 고시·양환·오정·설현·곽흥·진덕·왕지·김조흥·유통원·매사조·주양조·화운룡 등은 이미 죽었음에도 추좌하여 작위를 박탈했다. 이 외에도 연좌되어 처형된 수가 15,000명 안팎에 달했다. 이 사건을 이선장의 옥이라 부르는데 사건의 성격만 놓고 보면 제2차 호유용의 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홍무제 본인도 이를 두고 제2차 호유용의 옥이라 했으며 그들의 죄상을 정리해 『소시간당록』이란 서적을 간행해 천하에 고시했다. 하지만 호유용이 죽고 이미 10년이 지났음에도 많은 공모자가 이제서야 나타났다는 점은 비현실적인 측면이 있으며 훗날의 조익이 말했듯이 호유용의 이름을 빌려 공신을 숙청한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2년 뒤 섭승이 호유용의 당이라는 이유로 처형되면서 12년에 걸친 호유용의 옥은 드디어 끝을 맺었다.

    출처: 위키백과 호람의 옥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12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나라때 1380년 재상 호유용의 모반 계획을 계기로 일어난 숙청 사건인 호유용의 옥과 1393년 장군 남옥에 대한 숙청 사건인 남옥의 옥을 아울러 일컫는 것으로 홍무제의 치세 후기의 공포 정치를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원나라가 말기로 접어들면서 몽골족의 지배도 기울기 시작했고 백련교도들이 중심이 된 홍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화남 각지에서 진우량, 장사성, 한림아, 방국진 등의 군벌이 할거했고 그 중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이 다른 군벌을 제압하고 원나라를 북쪽으로 쫓아낸 뒤 명나라를 세웠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호람의 옥(胡藍-獄) 혹은 호람안(胡藍案)은 명나라 때인 1380년(홍무 13년) 재상 호유용의 모반 계획을 계기로 일어난 숙청 사건인 호유용의 옥(胡惟庸-獄) 혹은 호유용안(胡惟庸案)과 1393년(홍무 26년) 장군 남옥(藍玉)에 대한 숙청 사건인 남옥의 옥(藍玉-獄) 혹은 남옥안(藍玉案)을 아울러 일컫는 것으로 홍무제의 치세 후기의 공포 정치를 상징하는 사건들이다. 두 사건 모두 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고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