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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거북이38
활달한거북이3823.07.02

조선 시대의 혼인제도는 어떠 했는지 궁금합니다.

현재는 일부일처제로 법적으로 부인 1명, 남편 1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혼인 신고 후 법적인 부부가 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 혼인제도가 어떠 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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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0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혼인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고 합니다.

    계급과 나이에 따라, 성별에 따라 다양한 제한이 있었다. 왕실은 사대부 이하의 여인과 결혼할 수 없었고,

    양반은 천민과 결혼할 수 없었다. 또 조혼 풍습을 막기 위해 나이에 대한 제한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재혼이나 이혼의 경우, 칠거지악과 자녀안 등 여성 차별적인 규정이 심했다. 남성은 쉽게 이혼하고 재혼할 수 있었으나 여성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는 왕조 건립 초기부터 배불양유책과 더불어 중국으로부터『대명률직해』를 들여와 국법의 기초로 삼음에 따라 동성동본혼을 엄하게 규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기본은 1부 1처제 입니다. 다만 양반 가정에서 부인이 애를 낳지 못하거나 부부간에 문제가 있을 때 첩을 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조선 사회가 1부 다처제 사회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첩제도가 폐지 된것은 1920년 일제 강점기 가족법이 제정 되면서 부터 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사랑을 조건으로 혼인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유교는 효도관념에 의해 생식력을 기본조건으로 삼아 자손보존이라는 면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개인끼리의 의사에 의한 결합이라기보다는 집안끼리의 계약이라는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집안 어른들끼리의 협의에 의하여 결정되었던 중매결혼이 성행하여 왔다.

    그리고 혼인을 정하는 조건의 하나로 가문을 자세히 따졌다. 그것은 혼인에 의해 새로 생기는 사돈집과 처가, 그리고 외가라는 인척관계 사이에 작용하는 사회적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함으로써 비롯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점에서 혼인은 생활권의 확대라는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회경제적인 지위가 낮은 사람들 사이의 혼인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통혼권도 생활권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생활권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그것에 비해서 좁기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보인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는 왕조 건립 초기부터 배불양유책(排佛揚儒策)과 더불어 중국으로부터『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들여와 국법의 기초로 삼음에 따라 동성동본혼을 엄하게 규제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신라 및 고려시대에 발견되던 다처제 형태는 점차 사라지고 본처와 구분되는 첩제가 제도화되었다. 중국식 예교의 도입에 따라 적서(嫡庶) 구분을 명확히 하여 동시에 두 명의 적처를 둘 수 없음을 명시하고, 정적(正嫡) 이외의 서처는 첩 신분으로 전락시켰다. 1413년(태종 13)에는 중혼금지 법령이 제정되었는데, 사실상의 다처제 관행은 그 이후에도 존속했던 것으로 추론되며, 다처제 관행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중종시대 이후의 일이다.


    첩제의 확립과 더불어 적서 차별은 더욱 강화되어,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 제정을 통해 서자의 과거 응시를 불허하는 등 신분·출세·재산상속에 있어 심한 제약을 가하였다. 제례(祭禮)에 있어서도 정처가 사망한 뒤 개취하면 후처도 선처와 마찬가지로 적처의 대우를 받도록 하되, 선후 두 처만 사당에 모시고 첩은 서자가 별실에서 따로 제사하도록 하였다. 이토록 엄격히 적서를 차별함은 축첩을 억제하는 면이 있었으나, 가계계승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예(禮)·법(法)에서는 첩제를 공인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그러나 첩의 신분은 비천함을 면치 못하여 천첩(賤妾)은 물론 양첩(良妾)이라 할지라도 남편을 부군(夫君), 적처를 여군(女君)이라 칭하였으며, 적자에 대해서는 노비가 상전의 자제를 대할 때 쓰는 호칭인 서방님·도련님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첩제를 공인한 것은 가계계승의 목적에 기인한 것이나, 실제로는 탐색(貪色)과 방종 때문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축첩은 상류계층에서 보다 성행하였지만 일반서민들에게까지도 확산되어, 처와 첩간의 반목질시와 그들 후손간의 잦은 분쟁 등으로 인해 사회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는 왕조 건립 초기부터 배불양유책(排佛揚儒策)과 더불어 중국으로부터『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들여와 국법의 기초로 삼음에 따라 동성동본혼을 엄하게 규제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신라 및 고려시대에 발견되던 다처제 형태는 점차 사라지고 본처와 구분되는 첩제가 제도화되었다. 중국식 예교의 도입에 따라 적서(嫡庶) 구분을 명확히 하여 동시에 두 명의 적처를 둘 수 없음을 명시하고, 정적(正嫡) 이외의 서처는 첩 신분으로 전락시켰다. 1413년(태종 13)에는 중혼금지 법령이 제정되었는데, 사실상의 다처제 관행은 그 이후에도 존속했던 것으로 추론되며, 다처제 관행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중종시대 이후의 일이다.


    첩제의 확립과 더불어 적서 차별은 더욱 강화되어,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 제정을 통해 서자의 과거 응시를 불허하는 등 신분·출세·재산상속에 있어 심한 제약을 가하였다. 제례(祭禮)에 있어서도 정처가 사망한 뒤 개취하면 후처도 선처와 마찬가지로 적처의 대우를 받도록 하되, 선후 두 처만 사당에 모시고 첩은 서자가 별실에서 따로 제사하도록 하였다. 이토록 엄격히 적서를 차별함은 축첩을 억제하는 면이 있었으나, 가계계승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예(禮)·법(法)에서는 첩제를 공인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그러나 첩의 신분은 비천함을 면치 못하여 천첩(賤妾)은 물론 양첩(良妾)이라 할지라도 남편을 부군(夫君), 적처를 여군(女君)이라 칭하였으며, 적자에 대해서는 노비가 상전의 자제를 대할 때 쓰는 호칭인 서방님·도련님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첩제를 공인한 것은 가계계승의 목적에 기인한 것이나, 실제로는 탐색(貪色)과 방종 때문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축첩은 상류계층에서 보다 성행하였지만 일반서민들에게까지도 확산되어, 처와 첩간의 반목질시와 그들 후손간의 잦은 분쟁 등으로 인해 사회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