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민이었던 장영실은 어떻게 관직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조선시대 초기는 엄격한 신분 사회였지만 천민이었던 장영실은 관직에 올랐습니다. 천민이었던 장영실은 어떻게 관직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영실은 비록 관노 출신이었으나 그는 탁월한 재능을 어려서부터 발휘하여 주위로부터 인정받았고, 한양의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세종의 부왕인 태종때 발탁되어 궁중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장영실이 관직에 오르게 된 것은 태종 때가 아닌 세종 때였으며 세종은 제련 및 축성, 무기, 농기구의 수리에 뛰어난 장영실을 가까이 두어 자신이 반드시 이루고자 했던 사업중의 하나인 천문의기 제작사업을 비롯한 과학진흥사업에 참여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신분제가 행해지던 당시에 노비출신인 자를 궁중에 두어 관리로 중용케 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기에 모든 문무대신들의 반대는 당연한 일이었으나 세종은 장영실과 같은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대신들을 설득하여 결국 장영실을 채용하였다고합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영실은 본래 동래현의 관노이나 태종이 과학에 대한 훌륭한 재주를 인정하여 발탁되었다. 세종은 실용주의자로서 장영실의 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부왕의 뒤를 이어 중용하였다. 이처럼 장영실은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아 노비 신분을 벗어나 관인(官人)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세종의 특별한 배려로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에 임명된 이후 무관직인 정5품 사직(司直)이 되었고, 1433년(세종 15) 자격루 제작에 성공하여 정4품 호군(護軍), 1438년(세종 20) 종3품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세종이 장영실에게 호군의 관직을 더해 줄 것을 의논하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관노가 관인이 될 수 없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보인다. 이조판서 허조(許稠)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였다. 세종은 또 다른 대신들과 의논하는 과정에서 장영실의 사람됨이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정교하고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 강무(講武)[임금이 신하와 백성들을 모아 일정한 곳에서 함께 사냥하며 무예를 닦던 행사]할 때에는 내시를 대신해 명령을 전하기까지 하였으며, 장영실이 아니면 자격궁루(自擊宮漏)를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직을 더해 주었다.
1421년(세종 4) 세종은 장영실을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이때 장영실은 과학에 대한 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세종의 명에 따라 천문 기구를 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인 자격루[일명 보루각루(報漏閣漏), 1434년(세종 16) 경복궁 경회루 남쪽의 보루각에 설치]와 옥루(玉漏)[일명 흠경각루(欽敬閣漏), 1438년(세종 20) 강녕전 옆 흠경각에 설치]를 만들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영실은 본래 동래현의 관노이나 발명가로서의 훌륭한 재주를 태종이 인정해 발탁하게 되며 세종은 실용주의자로서 장영실의 적성을 중요히 생각해 부왕의 뒤를 이어 중용했습니다.
세종은 장영실을 1421년 윤사웅, 최천구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했고 귀국 후 장영실의 나이 약 34세때 1423년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고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종 5품 상의원 별좌에 임명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천민은 원래 관직에 오를 수 없었지만 세종 대왕의 특별 어명으로 1423년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에 임명하게 되는데 천민은 관료가 될 수 없다며 반대하는 신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세종의 뜻을 헤아린 조말생, 황희 등의 찬성으로 장영실은 관직에 오르고 승진도 할 수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대왕이 장영실을 등용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은 신분차별을 그다지 중요시하지않으셨습니다.
실력이 있는자라면 신분에 관계없이 빈부의차이없이 집안의 차이없이 등용을했던 것이죠 세종대왕은 이렇게 하신결과 지금까지도 성군으로 훌륭한왕으로 사람들입을 오고갑니다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영실은 조선시대 초기에 있던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도 어떻게 관직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그의 경우, 몇 가지 요인과 특별한 상황이 결합하여 관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재능과 열정: 장영실은 뛰어난 과학적 재능과 지식을 갖췄습니다. 그의 과학적 발견과 발명품은 당시에 큰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열정과 노력으로 많은 것을 달성했습니다.
장영실의 출신: 장영실은 양반(양반은 조선시대의 높은 신분 계층) 가문이 아닌 천민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장서유는 천재적인 능력을 갖춘 아들을 귀한 가치로 여겨 그를 교육하고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장영실이 더 높은 신분의 사람들과 교류하고 배우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후원자의 도움: 장영실은 과학적 연구와 발명을 위해 후원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의 학문적 활동을 지원한 사람들 중에는 관료나 양반들도 있었으며, 그들의 지원으로 그는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고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공로: 장영실은 천문학, 천문 계산, 기계공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를 내었습니다. 그의 공로와 업적은 조선시대 권위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로써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열렸습니다.
요약하면, 장영실은 천민 출신이었지만 재능, 노력, 가정환경, 후원자의 도움, 그리고 성공적인 공로와 업적을 통해 관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요인들은 그가 조선시대 초기에 뚜렷한 예외 사례 중 하나로서 특별한 지위를 얻게 된 원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