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미니멀리즘 등의 미술 사조에 대한 질문

미니멀리즘은 상상계의 일종이라 할 수 있나요? 현실은 본질 따위의 말로는 구분할 수 없다는 관점 하에 미니멀리즘은 상상계로 보이지만, 또 그것을 볼 때 느껴지는 인간 구조적 허무에 대해 보자면 현실계에 맞닿은 것 같기도 해서, 의견이 궁금합니다

1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최지숙 전문가입니다.

    미니멀리즘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개념인 상상계, 현실계를 연결하는 시도는 예술의 본질과 인간의 인식 구조를 관통하는 매우 날카롭고 깊이 있는 접근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미니멀리즘은 상상계의 속성을 완전히 탈피하려는 시도였으나 그 극단에서 오히려 현실계의 낯선 덩어리와 마주하게 만드는 이중적인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이 짚어주신 대로 현실은 본질이라는 고정된 말로 재단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보면 미니멀리즘이 추구한 극단적인 순수성이나 근원적 형태는 상상계적 환상에 가깝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라캉의 상상계는 주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완전한 이미지를 보고 오인하며 형성되는 통합성과 완결성의 세계입니다. 미니멀리즘 회화나 조각이 복잡한 서사와 재현을 모두 지워버리고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나 단색의 표면만을 남겨두었을 때 그것은 일종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본질이라는 완결된 환상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균열도 없는 매끄러운 본질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열망이 투영된다는 점에서 상상계적 측면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상상계적 환상이 깨어지며 현실계의 징후가 드러납니다. 라캉의 현실계는 상징계의 언어로 포착되지 않고 상상계의 이미지로 포장되지 않는 잔여물이자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날것의 실제입니다. 작품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을 때 감상자는 텅 빈 기표의 심연을 마주하게 되며 말씀하신 구조적 허무와 기이한 불안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의미의 과잉이 아니라 의미의 절대적 부재를 통해 주체는 자신의 존재론적 결여를 깨닫고 현실계의 서늘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미니멀리즘은 기하학적 완결성이라는 상상계적 외관을 빌려 세상의 모든 상징적 의미들을 지워나갔지만 그 끝에서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거대한 사물의 존재감만을 남겨둠으로써 우리를 현실계의 문턱으로 인도하는 독특한 사조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재현하려는 인간의 오랜 노력을 멈추고 사물 그 자체의 낯섦을 직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현실계의 속성에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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