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 있는 언양 읍성 유래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울산에 가면 언양이랑 곳이 있는데 불고기가 정말 유명하더라고요. 옛날 TV 프로그램 1박2일 때문에 많이 유명해졌더라구요. 이곳에도 언양읍성이라고 있던데 유래가 알고싶어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언양읍성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형: 유적
*성격: 성곽
*읍성건립시기·연도: 삼국시대
*규모(면적)지정면적: 4만 1,349㎡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서부리
1966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41,349㎡, 둘레 약 1,000m. 현재 성곽의 일부가 남아 있다. 언양읍성은 토성과 석성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토성은 삼국시대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둘레는 1, 498척, 높이는 8척이었다.
이후 1500년(연산군 6)에 현감 이담룡(李聃龍)이 돌로 개축하여 확장하였는데, 이때의 둘레는 3,064척, 높이가 13척이었다. 또한, 첩(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834개소이고 성안에는 우물이 네 곳 있었는데 현존하는 석성은 둥글게 자리잡은 성의 기초 위에 축조되어 있다.
보통의 성벽은 무사석(武沙石) 모양의 반듯한 돌 또는 산돌을 차곡차곡 쌓는 방식으로 축조하는 것이나, 이 성에서는 거대한 바위를 굴려서 면만 거칠게 다듬어 바르게 잡은 위에 역시 큰 돌을 떠다 얹어 큰 돌과의 사이에는 무수한 잔돌을 끼워박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매우 견고하여 웬만한 충격에는 견디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지금도 상당한 부분이 잘 남아 있다.
성의 기초는 중간중간에 돌출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문지(門址)나 포루(砲樓)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방어에 상당한 경험과 군사지식이 있는 사람의 설계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읍성과 짝을 이루는 산성은 취서산(鷲棲山)의 단조성(丹鳥城)으로서, 유사시에는 방어하기에 유리하도록 축조되었다. 이 성의 축조방법과 배치는 거제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역시 조선 초기의 것으로 신라시대 이래 왜적방어를 목적으로 한 기지였다.
언양읍성도 경주 남산의 신성(新城)이나 문무왕 때에 축조된 부산성(富山城) 등의 석축기법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신라 이래의 축성방법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지역은 경주·울산·밀양·양산과의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이 읍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울주언양읍성 [蔚州彦陽邑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종묘와 사직단이 있는 곳을 ‘도’(都)라고 한다면, 이것이 없는 곳을 ‘읍’(邑)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왕이 거주하는 수도 서울의 둘레에 쌓은 성이 ‘도성’, 왕이 아닌 군·현의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이 ‘읍성’입니다.
언양 읍성은 삼국시대 부터 축조 된것으로 보고 있고 이후에 계속적으로 보완 된것으로 보입니다.
축조 이유는 왜적의 방어를 위한 것이라 보면 될듯 하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에 있는 조선시대 언양현의 읍성.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 언양현조에 의하면 1390년(공양왕 2)에 처음으로 둘레 1,417척, 높이 8척의 토성을 쌓았는데 군창(軍倉)과 연못 4곳, 우물 2곳이 있었다고 한다.
출처:울산역사문화대전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6년 12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삼국시대에 토성으로 축조되어 조선 전기까지 내려오다 연산군 때 석성으로 개축되며 확장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래 언양 읍성은 경주 남산의 신성(新城)이나 문무왕 때에 축조된 부산성(富山城) 등의 석축기법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신라 이래의 축성방법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 됩니다. 특히, 이 지역은 경주·울산·밀양·양산과의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이 읍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전부 소실되었다가 조선시대에 다시 재건 되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언양읍성은 사적 제153호로 지정된 조선 시대의 성이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따르면, 언양읍성은 고려 공민왕 2년(1390)토성으로서 최초로 축조되었다.
석성(石城)으로 개축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증보문헌비고》에 있는데,
연산군 5년(1500)에 현감 이담룡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