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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얀굴뚝새243
뽀얀굴뚝새243

영조 때 탕평책이 만들어진 배경이 궁금합니다.

음식으로도 탕평채라는 것이 있는데

청포묵에 여러가지 채소를 곁들여서

먹습니다. 정치적으로 분열이 되어서

탕평책을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러한 정책을 왜 만들었고 성과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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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노론과 소론이라는 두 개의 큰 당파가 대립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당쟁은 세제책립, 대리청정 등의 시비로 격화되어 신임사화라는 큰 혼란을 불러왔습니다. 영조는 이러한 당쟁의 폐해를 직접 경험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적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영조는 당쟁을 막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탕평책을 추진했습니다. 탕평책은 당파를 초월한 인재를 등용하고, 양당의 의견을 균형 있게 수렴하는 정책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조의 탕평책은 붕당 간의 대립 완화와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노론의 독주를 막기 위해 붕당과 관계없이 인재를 두루두루 등용하였고,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는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인 탕평파를 육성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탕평책은 영조가 서로 다른 무리의 신하들이 골고루 벼슬을 할 수 있도록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는 제도입니다. 조선후기에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서로 무리를 지어 편이 갈라졌습니다. 노론 소론 남인 북인 등으로 나뉘어져 정치를 했는데 이를 붕당정치라고 합니다. 초기에는 건전한 토론이 이루어졌지만 갈수록 정치적 싸움만 치열해졌습니다. 이를 해소하고자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우고 탕평책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