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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한 쇠똥구리
고혹한 쇠똥구리23.04.22

5일장 7일장 장날의 유래와 역사를 알고 싶어요.

도시에는 잘 모르겠지만 시골에는5일장과 7일장이라고 있는데 이런 장날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됐으며 이런 장날의 역사가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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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5일장은 5일마다 열리는 장을 말합니다.

    5일장이 서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시대 15세기 말 시작한 열흘 간격으로 열리던 장시(시장)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수가 증가하여 17세기 후반에는 5일 간격으로 열리게 됩니다.

    열흘간격이 닷새간격으로 바뀌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바로 보부상입니다.

    부보상들은 생산된 물품들을 무리를 지어 혹은 개별적으로 지역을 정해놓고 짊어지고 다니는데 시장과 시장을 옮겨다니는데 알맞는 기간이 5일이었습니다. 17세기 후반부터 상업의 발달로 이 봇짐장수들이 활성화 되면서 시장도 한층 더 활성화가 된 셈이죠. 5일장은 한 지역에서 한달에 여섯번을 서게 되지만 큰 마을 단위로 서게되므로 한 군에서 보통 세군데에서 많은면 4-5군데서 장이 날짜를 번갈아 가면서 섭니다. 군을 하나로 보면 한달 내내 장이 옮겨다니면서 열려 한달중 20일 가까이 하나의 군에서 장이 선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이 시장체계의 형성은 적어도 한 군의 범위에서 교환이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하나의 지역적 시장권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5일장은 이후 20세기 말까지 꾸준한 생명력을 가지고 자생해 왔으나 지금은 도시화와 산업화로 상설시장에 밀려 많이 없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일장(장날)

    선정취지 및 필요성

    우리 민족의 정취와 지혜가 담긴 장소로서의 상징성을 지닌다. 특히 조선시대에 정착, 확대된 오일장 체제는 그 유래가 드문 것이라 하겠다.

    역사적 배경 및 상징물의 의미로

    오일장은 지방에서 열린 ‘향시(鄕市)’의 한 형태로 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루었다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날이 정확하게 언제 정해졌는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15세기 경에서 시장이 크게 증가하면서 17세기 후반부터 장날을 열흘로 하던 장날을 5일

    또는 7일 장날로 통일을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일장은 지방에서 열린 ‘향시(鄕市)’의 한 형태로 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루었다. 향시는 크게 매일 열리는 상설시와 아침저녁으로 열리는 조석시, 그리고 일정 기간을 두고 열리는 정기시로 나뉜다. 정기시에는 2일장·3일장·5일장·10일장·15일장·연시(年市) 등이 있었으나 가장 보편적인 것은 한 달에 5일 간격으로 여섯 번 열리는 오일장이었다.

    (출처:전통문화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