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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그대로멈춰라
똑똑그대로멈춰라23.08.24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 시키고 왕위에 오른 인조. 그의 인생과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한 장면이 나오는데요.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죠. 그런데 인조는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인가요? 한나라의 임금이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땅에 찍고 피가날만큼 절을 해야할 정도로 당시 조선의 국력은 약해져있던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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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당시 조선의 국력이 많이 약해져 청이 요구하는대로 청과 조선이 군신의 관계를 맺는 것이 최선이었으리라고 판단했을겁니다. 실제로도, 왕이 수도를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갈 정도로 조선의 힘은 약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쇠해지면서 명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소용 없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빈면 명의 쇠퇴를 틈타 세력을 키운 청의 국력은 아주 강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말씀하신 삼전도의 굴욕은 생각보다 손꼽을 정도로 굴욕적인 사건이 아니었으리라는 가능성이 최근 대두되고 있습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례를 미디어에서는 땅에 머리를 쾅쾅 박이서 이마에 피가 철철 흐르는 모습으로 묘사하지만, 사실은 명나라 때부터 있었던 관습으로 명나라 황제에게 인사하는 예절입니다. 실제로 머리를 땅에 박지도, 피가 흐르지도 않는 그냥 조금 긴 인사일 뿐인겁니다. 실제로 인조실록에도 이 삼전도에서 삼궤구고구례 의식을 행했던 것에 대해 상당히 무미건조하게 쓰고 있고 딱히 이마 쾅쾅 피 철철 이런 묘사릉 하고 있지더 않습니다.


    정리하자면, 조선이 청에게 결국 머리를 조아리고 군신의 관계를 수락한 것은 명을 따르고 명의 은혜를 갚자고 생각했던 조선사람들 입장에선 정말 치욕스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청에게 조아리는 대신 맞서 싸웠다한들, 청에게 대항할 수 있었으리라거나 동아시아 패권을 조선이 장악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삼전도의 굴욕을 맞은 것은 최선의 선택들 중 하나였을 겁니다. 그럼에도 기억할 점은,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리는 삼고구고두례의 예절이 이마 쾅쾅 피 철철 그 정도가 아니고 단순히 입조할 때의 인사 예절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사실 현대적 관점에선 생각한만큼 치욕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정묘호란으로 후금과의 관계를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정하였으나 조공문제 등으로 갈등을 빗다가 병자호란을 맞게됩니다.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청나라 군대는 물밀듯이 침략해왔고 조정은 주전파와 주화파 사이의 갈등으로 나뉘어서 갈등을 하는 사이 청태종은 강화도에 있었던 왕실가족을 볼모로 인조의 항복을 강권했고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을 버티던 인조도 더이상버티지 못하고 삼전도에 나와 청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례의 치욕스런 굴욕을 당하게 됩니다. 조선은 너무나도 허약한 국가였고 청이 위낙 강한 군대였던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 당시 조선은 왕이 청나라의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려야할만큼 국력이 매우 약해져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전도의 굴욕은 인조와 조선왕조의 치욕의 날이었습니다. 강화여건이 너무나 안좋았습니다. 정묘호란을 거치고 형제관계를 맺고 친명정책을 철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인조와 정부는 병자호란을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하려 가는 길에 청군에 가로막혀 남한산성에 갖혔습니다. 남한산성에서 항전의지를 다졌지만 병력은 줄고 생필품과 식량난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대등하게 싸우다 혹은 청군의 피해가 상당하고 함락시키지 못했다면 그런 굴욕까지는 당하지 않았을텐데 상황과 여건이 매우 안좋았고 청의 정복자적 승리와 외교적 무례가 겹친 사태라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