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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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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아이를 자연분만으로 낳지 못하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었나요?

현대의학에서 출산을 하는 방법은 크게 자연분만과 제왕절개 수술이 있잖아요.

그런데 과거엔 의학기술이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을텐데, 자연분만으로 아이가 나오지 않는 경우엔 어떻게 했을까요?

산모와 아이가 그대로 죽을 수 밖에 없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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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때 임산부 사망률은 대단히 높았다고 합니다. 의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감염 등으로 사망하였다고합니다. 다산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제 17권에서는 아내 풍산 홍씨이 출산 이야기를 이렇게 적었다고합니다. < 내가 처음 경자년(1780년, 정조 4년) 가을 예천의 군사에서 애기 하나를 지웠고, 신축년 7월에 아내가 학질로 인해 계집애 하나를 여덟 달 만에 출산했는데 4일 만에 죽었으므로 미처 이름을 짓지 못한 채 와서의 언덕에 묻었다. 그다음에는 무장과 문장을 낳았는데, 다행히 성장하였다. 그다음이 구장이고, 그다음은 딸아이 효순인데, 순산했기 때문에 효순이라 한 것이다. 구장이와 효순이에게는 모두 광명이 있으나, 진짜 광명이 아니라 책에만 기록한 것이다. 그다음에는 딸 하나를 얻었는데, 지금 열 살이 되어 이미 두 번째 홍역을 지냈으니, 아마 이제는 요사를 면한 것 같다. 그 다음은 삼동으로, 곡산에서 천연두로 요절하였다. 그때 아내는 아기를 가졌었는데 슬퍼하는 중에 아들을 낳았는데, 열흘이 지나 또 천연두를 앓다가 며칠 안 되어 요절하였다. 그다음이 곧 농장이다. 삼동이는 병진년(1796년, 정조 20년) 11월 5일 태어나서 무오년 9월 4일 죽었으며, 그다음 애는 이름이 없다. 구장이와 효순이는 두척산에 묻었고, 삼동이와 그다음 애도 두척산 기슭에 묻었으니, 농장이도 역시 두척산 기슭에 묻어야 할 것이다. 모두 6남 3녀를 낳았는데, 산 애들이 2남 1녀이고 죽은 애들이 4남 2녀이니, 죽은 애들이 산 애들의 두 배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자연분만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 시기에는 현대의 의료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출산은 자연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성들은 주로 가족이나 동료 여성들과 함께 이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슬이 시작되고 진통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분만이 진행되었고 그래서 산파 라고 하는 분만을 도와 주는 여인의 역할이 중요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