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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숙의 반란은 어떤거였는지요?

안녕하세요 신라 선덕여왕때 칠숙의 난이 있었다고 역사에서 배웠는데 칠숙 석품등이 주도했네요 어떤 이유로 반란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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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칠숙의 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삼국사기』 진평왕(眞平王) 53년 조에는 이찬(伊湌) 칠숙(柒宿)과 아찬(阿湌) 석품(石品)의 반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진평왕 53년(631) 여름 5월에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과 반란을 꾀하였는데, 왕이 이를 알아채어 칠숙을 잡아 목을 베고 구족을 멸하였으며,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의 국경에 이르렀다가 처자를 보고자 하여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돌아와 총산에 이르렀다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어 나무꾼의 해어진 옷과 바꾸어 입고,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왔다가 잡혀 사형을 당한 사건이다.

    같은 사건이『화랑세기』17세 풍월주 염장공(廉長公) 조에도 나와 있다. 염장공은 유신공의 부제(副弟)였는데, 춘추공을 부제로 삼아 풍월주의 지위를 넘겨받았다. 염장공은 선덕 공주(善德公主)에게 몰래 붙어 칠숙의 난을 다스리고, 그 공으로 발탁되었다. 선덕이 왕으로 즉위하자, 염장공은 조부(調府)의 영(令)이 되어 유신과 춘추에게 재물을 공급하여 주었고, 또한 개인적으로도 많은 치부를 하여, 그때 사람들이 염장공의 집을 가리켜 수망택(水望宅)이라 하였다고 한다. 금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면 홍수와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 기록만 가지고는 칠숙·석품이 일으킨 반란의 원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진평왕이 칠숙의 난이 일어난 이듬해인 54년(632) 정월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로 미루어,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일어났던 칠숙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선덕 공주가 깊이 관여하였거나 어쩌면 주도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와 『화랑세기』가 전하는 내용의 차이이기도 한데, 『삼국사기』에는 칠숙의 난을 진압한 이가 진평왕으로 나오고 있는데 반해, 『화랑세기』에는 선덕 공주가 칠숙의 난 진압에 관여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칠숙이 난을 일으켰을 때 진평왕은 66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선덕 공주가 난의 진압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좀더 높다. 또한 당시 선덕 공주의 왕위 계승은 이미 정해진 상황이었므로, 칠숙 등은 여왕의 즉위 또는 선덕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수 있다.
    여하튼 그 때 풍월주이던 염장공은 상선(上仙)으로서 선덕 공주를 도왔고, 선덕 공주 또한 염장공 등을 거느리게 되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당시 풍월주들의 정치적 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염장공은 그 공으로 발탁되어, 선덕이 즉위하자 조부(調府)에 들어가 장관인 영(令)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칠숙의 난 (문화원형백과 신라화랑, 2003.,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시대 신라 진평왕 53년에 일어난 반란으로 주동자는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53년

    여름 5월 이찬 칠숫과 아찬 석품이 반란을 꾀하였다. 임금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쪽 시장에서 목 베고 아울러 구족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으나 처와 자식을 보고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어 총산까지 돌아오다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해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바꿔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는 나중에 일어난 비담의 난과 비슷하게 왕권승계 과정에서 선덕여왕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진골 귀족 위주로 생기고 권력쟁탈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칠숙·석품의 난은 신라 진평왕 53년(631년)에 일어난 반란이다. 이찬 칠숙(柒宿), 석품은 함께 반란을 꾀하였지만 발각되어 칠숙은 동시(東市)에서 목이 베어 죽었다. 9족(族)도 함께 처벌되었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의 국경에 이르렀는데, 처자식을 보고 싶어 몰래 집에 가다 잡혀 처형됐다.

    -출처: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칠숙과 석품은 실제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드라마상에서는 칠숙과 석품의 난을 미실의 난으로 바꿔서 이야기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미실이 난을 일으켰다는건 삼국사기나 유사는 물론이고 화랑세기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 칠숙과 석품의 난은 분명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