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로고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6

정묘호란이 일어난 이유와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정묘호란이라고 하는 전쟁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리고 정묘호란의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월 중순부터 3월 초에 걸쳐 약 2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탐내어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경향이 고조되었지만,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동아(東亞)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신중한 중립적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그리하여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명군을 돕게 하면서도 형세를 판단, 향배(向背)를 달리할 것을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명군이 사르후전투(薩爾滸戰鬪)에서 대패한 뒤 계속 수세에 몰리자, 강홍립은 후금과 휴전하고 출병이 불가피했음을 해명하였다.

    그 결과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설진(設鎭)해 요동 수복을 꾀하는 거북한 사태가 벌어졌지만,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별다른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 때의 대외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는 한편, 모문룡을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후금은 배후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고, 명나라에 이어 조선과도 경제 교류의 길이 막혀 극심한 물자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때문에 후금은 무력적인 수단으로 이를 타개할 기회를 노렸다.

    한편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게 되었다. 이에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친 방침에 반대, 주전론을 주장해왔던 청나라 태종은 더욱 침략의 뜻을 굳혀 1627년 1월 아민(阿敏)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군의 주력 부대는 용천·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하고, 일부 병력은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곽산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비롯, 곳곳에서 후금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도의 모문룡도 신미도(身彌島)로 패주하였다.

    후금군의 침입이 조정에 알려지자 인조는 장만(張晩)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여러 신하를 각지에 파견해 근군(勤軍)을 모집하였다. 그 동안 후금군은 남진을 계속, 안주성을 점령하고 다시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평산에 포진했던 장만은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전세가 극도로 불리하자 김상용(金尙容)이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어 서울을 지키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남하하였다. 이 사이 인조는 전란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갔다.

    한편,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다. 특히 정봉수(鄭鳳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는 데 따르는 후방의 위협을 염려하게 되었고, 조선은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이에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더라도 상국인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3월 3일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조선과 후금의 화약은 두 나라가 다같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후금과의 형제 관계를 굴욕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더욱이 막대한 세폐(歲幣)와 수시로 강요하는 물자의 조달에 따르는 과중한 경제적 부담에 반발, 배금의 길을 굳히게 되었다.

    후금 역시 세폐와 중강(中江)의 개시(開市) 등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모문룡의 세력을 공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배금 경향이 날로 고조되는 데 불안을 느꼈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는 후금이 더욱 팽창된 세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강압적인 태도를 강화함으로써 악화일로를 걷게 되어 결국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묘호란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23.05.28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묘호란 ; 후금(청)의 건국자 누루하치의 사망과 산해관 패전으로 대내외적으로
    동요가 일어나자 그 후계자 홍타이치가 그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
    이는 주변국에게 청의 강건함을 보여주기 위한 뜻도 있었다고 보여짐.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16년 여진족이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큰 마찰없이 지냈으나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가 금나라를 배척하는 향명배금 정책을 표방하고 랴오둥을 수복하려는 모문룡 휘하의 명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의 가도에 주둔하는 것을 허락하고 군사원조까지 하고 나서자 명나라를 치기 위해 중국 본토로 진입하려던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정복해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으며 후금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각한 물자부족에 시달려 이를 조선과의 통교로써 타개해야 할 처지였습니다.

    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해 후금 태종은 더욱 결전의 뜻을 굳히게 됩니다.

    1627년 1월 아민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 용천, 선천을 거쳐 청천강을 넘었습니다.

    그들은 전왕 광해군을 위해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진군해 안주, 평산,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를 장악했으며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싸우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했고 인조 이하 조신들은 강화도로 피신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란합니다.

    황주에 이른 후금군은 2월 9일 부장 유해를 강화도에 보내 명나라의 연호 천계를 쓰지 말것, 왕자를 인질로 할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했습니다.

    이에 양측은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정묘조약을 맺고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측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을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합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월 중순부터 3월 초에 걸쳐 약 2개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탐내어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경향이 고조되었지만,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동아(東亞)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신중한 중립적 외교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그리하여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명군을 돕게 하면서도 형세를 판단, 향배(向背)를 달리할 것을 비밀리에 지시하였습니다. 명군이 사르후전투(薩爾滸戰鬪)에서 대패한 뒤 계속 수세에 몰리자, 강홍립은 후금과 휴전하고 출병이 불가피했음을 해명하였습니다.

    그 결과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설진(設鎭)해 요동 수복을 꾀하는 거북한 사태가 벌어졌지만,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별다른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 때의 대외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는 한편, 모문룡을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후금은 배후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고, 명나라에 이어 조선과도 경제 교류의 길이 막혀 극심한 물자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후금은 무력적인 수단으로 이를 타개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한편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친 방침에 반대, 주전론을 주장해왔던 청나라 태종은 더욱 침략의 뜻을 굳혀 1627년 1월 아민(阿敏)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습니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군의 주력 부대는 용천·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하고, 일부 병력은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하였습니다. 조선군은 곽산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비롯, 곳곳에서 후금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도의 모문룡도 신미도(身彌島)로 패주하였습니다.

    후금군의 침입이 조정에 알려지자 인조는 장만(張晩)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여러 신하를 각지에 파견해 근군(勤軍)을 모집하였습니다. 그 동안 후금군은 남진을 계속, 안주성을 점령하고 다시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산에 포진했던 장만은 개성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전세가 극도로 불리하자 김상용(金尙容)이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어 서울을 지키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남하하였습니다. 이 사이 인조는 전란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갔습니다.

    한편,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습니다. 특히 정봉수(鄭鳳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습니다.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는 데 따르는 후방의 위협을 염려하게 되었고, 조선은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남지 않았습니다.

    이에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더라도 상국인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3월 3일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습니다.

    조선과 후금의 화약은 두 나라가 다같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은 후금과의 형제 관계를 굴욕적인 것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더욱이 막대한 세폐(歲幣)와 수시로 강요하는 물자의 조달에 따르는 과중한 경제적 부담에 반발, 배금의 길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후금 역시 세폐와 중강(中江)의 개시(開市) 등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모문룡의 세력을 공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배금 경향이 날로 고조되는 데 불안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는 후금이 더욱 팽창된 세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강압적인 태도를 강화함으로써 악화일로를 걷게 되어 결국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