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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행자23.05.16

조선후기 형성된 개화파 분화 양상이 궁금합니다.

조선후기 북학파 실학자인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등장해서 19세기 전, 후반 실학자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나눠졌는데, 그 차이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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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이 즉위 초에는 흥선대원군이 10여년 동안의 대리청정이 실시됩니다.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거부를 10여년 동안 정치의 모토로 삼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정비하여 개혁하겠다. 하지만 개혁도 많이

    했지만 당시의 국제정세는 이것으로만 살아 남을 수는 없었습니다. 근대식 제도, 군대, 문화를 받아 들였어야 했고 조선은 10여년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에 맞써 개화를 주장하던 인물들이 김옥균, 서재필, 민씨 세력 들이었는데 그들은 흥선대원군의 실각이후에

    급진개혁파와 온건개혁파로 나누어 지게 됩니다. 급진개혁파는 신속하게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바꾸

    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온건개혁파는 우리의 제도 및 문화 위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 들여서 점진적으로 개혁을 해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

    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온건개혁파는 그들의 기득권을 영원히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었을 것 같습니다. 청나라에 의존하는 지금의 조선의

    조정을 그대로 유지하여 권세를 누리고 싶었던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들게 합니다. 급진개혁파는 이러한 온건개혁파의 견제를

    받으면서 정말 답답해 하였을 것 같습니다. 세계는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하는데 자신들은 우물안의 개구리로 서양 및 외세 세력이

    조선에 야욕을 이제 대놓고 들어내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했었을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개화파의 분화-

    개화파는 개항 후 개화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중에 1881년(고종 18)까지는 수구파인 위정척사파의 공격에 대응하기에도 힘이 부족한 형편이어서 아직 개화파 내부의 분화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갈등은 주로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개화파의 개화활동을 불안하게 보고 있던 유생들은 1880년 10월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 주일 청국대사관의 중국인 외교관 黃遵憲이 지어준≪朝鮮策略≫을 국왕에게 바치고 이 책이 필사되어 유생들에게 전해지자 전국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개화파와 정부의 개화정책을 비판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출처:우리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