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당서와 신당서는 어떤차이가 있는가요?
중국당나라의 역사를 다루는 역사서가 구당서, 신당서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데 구당서와 신당서는 어떤차이가 있는가요? 그리고 어떤것이 정사로 인정되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완성 및 주상(奏上)은 후진 개운(開運) 2년(945) 6월로, 그 이듬해에 후진이 멸망하는 바람에 편찬책임자가 도중에 교체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고, 덕분에 한 인물이 두 개의 <열전>으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거나 초당(初唐) 시기에 비해 만당(晩唐) 시기에 대한 기술이 다소 빈약하다는 등의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한다. 때문에 후세의 평판은 좋지 않았고, 북송(北宋) 시대에 다시 《당서》(唐書)가 편찬되기에 이르렀다(《신당서》). 그러나 거꾸로 당대 《실록》 등의 1차 사료의 원문들이 고스란히 인용되어 있어, 사료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오히려 《구당서》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발해사의 해석 문제에서 《구당서》와 《신당서》는 각기"발해말갈의 대조영은 고려의 별종이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속민이던 족속인데 성은 대씨였다."
라고 기술해,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혹은 속말말갈계 고구려인)이냐 말갈인이냐에 대해 한국 학계와 중국, 일본 학계의 해석이 다르다.
참고로 《구당서》에서는 고구려에 대해서 부여의 별종이라고 평하기도 했다("高麗者 出者夫餘地別種也")
또한 당시 일본 열도에 대해 <왜국전>(倭國傳)과 <일본국전>(日本國傳) 등 두 열전이 입전되어 있는데,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그 나라가 해 뜨는 변두리에 있으므로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고 했다. 또는 왜국이 스스로 그 이름이 아름답지 않음을 꺼려서 일본이라고 고쳤다고도 하고, 일본은 예로부터 소국이었는데 왜국의 땅을 병합했다고도 한다.(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或云: 日本舊小國, 倂倭國之地.)
고 되어 있다. 또한 《구당서》에는일본국의 남쪽과 서쪽은 큰 바다를 접하고, 동쪽과 북쪽은 큰 산으로 막혀있으며, 큰 산 너머에는 모인(毛人)의 나라가 있다.(西界南界咸至大海東界北界有大山爲限山外即毛人之國)고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일본 정치의 중심이 교토임을 고려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산은 오늘날 일본 알프스라 불리는 히다 산맥(飛騨山脈), 키소 산맥(木曽山脈), 아카이시 산맥(赤石山脈)을 말하는 것이며 그 너머의 모인(毛人)은 아이누족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기록은 송대 초기의 《태평어람》에도 인용되었는데 이 기록에 대해서는 편찬 과정에서 존재했던 일본의 존재에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설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모리 기미유키(森公章)는 일본이라는 국호 성립 이후에 최초의 견당사(遣唐使)가 파견되었던 702년 이후에도 국호 변경 사유를 일본측에서 특별히 밝히지 않았을 가능성을 지적했고, 오오바 오사무(大庭脩)는 이를 간단히 편찬 과정에서의 실수라기보다는 <왜국전>과 <일본국전>의 왜국(일본) 관련 기사의 중절된 시간대에는 백강구 전투 및 임신의 난이 있었으며, 당시의 중국측에는 임신의 난에 의해 '왜국'(덴지 덴노의 정권)이 무너지고 '일본국'(덴무 덴노의 정권)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존재했기에 이에 대해 확실하게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이설로써 모두 병기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