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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찬밀잠자리170
대찬밀잠자리17023.06.09

이재수의 난이 무슨사건인가요?

한국 천주교 3대사건 중 하나가 이재수의 난이라고 하던데 당시에 어떤일이 있었길래 한국 천주교 3대사건이라고 할수있는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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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축민란(辛丑民亂)은 구한말 가톨릭 교회와 그들을 앞세운 봉세관(封稅官)이 제주도 토착민에게 수탈, 강간 등의 흉악범죄를 저지르자 민중들이 자위 집단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해 맞선 민중 항쟁이다.
    주동자인 이재수의 이름을 딴 '이재수의 난'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는 계속되는 흉년과 경래관(京來官)의 탐학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정부에서 파견된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의 남세(濫稅)와 이와 결탁한 천주교도의 작폐가 심각하였습니다. 1901년 대정군 인성리에서 일어난 군민과 천주교도의 충돌사건이 민란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군민들은 봉세관의 토색과 천주교도의 잔인성을 성토하고 이의 광정(匡正)을 목사에게 호소하려 하였습니다. 이 때 자진 참가하여 민군(民軍)의 주장(主將)이 되어 천주교도의 응징을 적극 촉진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대정군민의 궐기에서 3개 읍민의 궐기대회로 확산되어 제주성을 둘러싼 민군과 주(州) 성내의 천주교도 사이에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주 성내에서는 주민과 천주교도 사이에 반목이 생기고 부녀자들의 천주교도군에 대한 반대궐기가 일어났는가 하면, 주 성밖에서는 은신해 있던 천주교도들이 민군측에 의하여 살해되는 사태가 나타났으며 입성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정부에서는 진압군을 파견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프랑스함대와 일본군함까지 출동하는 사태로 발전하였습니다. 결국, 정부진압군에 의하여 이재수 등은 서울로 압송되고, 주민들은 사후대책을 보장받음으로써 난은 진압되었습니다. 한편, 평리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대찬밀잠자리170님.

    "이재수의 난"은 19세기 후반, 천주교를 배경으로 한 한국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교리 해석의 분쟁이 일어났을 때 발생했습니다.

    이재수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조선의 천주교 교회 체제에 반발하여 천주교 신자들로 구성된 독립적인 교회를 설립한 사람입니다. 이재수는 본래 천주교 교회의 신부로서 활동하다가 그의 해석에 따라 일부 신자들과 함께 분리되어 독립적인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재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세운 이 독립 교회는 자체적인 교리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신자들을 교육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기존 천주교 교회의 교리와 대립하였으며, 이로 인해 천주교 교회 내에서 큰 분란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재수의 난"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일컫는 말로,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한국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교리에 대한 해석과 이해, 그리고 신앙 실천의 방식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쟁은 결국 이재수의 체포와 처형으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이재수의 추종자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한국 천주교사에서 아픔과 고난을 겪어야 했던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