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왕비인 민비와의 세력관계가 궁금합니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왕비인 민비와의 세력관계가 궁금합니다. 왜 둘이는 결국 외세의 힘을 빌렸나요? 구한말 패망의 시초가 흥선대원군 쇄국정책 아닌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구한말 패망의 시초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라는 말은 잘 못 되었습니다.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는 패망의 기운이 보였고 나라는 부패했습니다. 안동김씨, 풍양조씨에 의한 세대정치가 판을 쳤습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우리가
성장했으려면 정조가 조금 더 오래 살 거나 후계자를 잘 양성 했어야 합니다. 정조가 김조순에게 자신의 아들을 부탁하면서 그를 너무 신뢰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흥선대원군은 이 쓰러져 가는 조선을 나름의 방법으로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고 무너지 조세제도를 다시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말에는 나라에 바칠 세금이 10이면 지방관들은 50을 걷어 죽은사람에게도 군포를 걷고, 갓난 아이에게도 걷고 방납이라고 하여 내륙에 있는 사람에게 전복을 내게 하고 해안에 있는 사람에게 산삼을 바치게 하고 이러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짓이 일반화 된 것이 1800년대(정조의 사후) 입니다. 이러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그들에게 철퇴를 가한 것이 흥선대원군입니다. 물론
세계사의 흐름속에 편승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극 보수였던 흥선대원군의 생각은 외국과 교역하면 나라를 망치겠구나
나라가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명성황후와는 사이가 매우 안좋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자주국방이었고 명성황후는
외세와 교역해야 한다는 주의였습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반대를 위한 반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민씨 세력이 조정을 장악하자
그들이 보였던 매관매직, 뇌물,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의 차별 등 썩었던 조선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고종이 어릴때는 흥선대원군 세력이
강하였고 임오군란 이후에는 명성황후의 세력이 강하였습닏. 명성황후는 외세에 의존적이었습니다. 임오군란때도 청나라에게 힘을 빌렸고
갑신정변때도, 동학농민운동때도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자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면
결국은 더 큰 것을 내주어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구한말의 패망의 시초는 흥선대원군이 아니며 망하려던 조선을 고쳐 보려 했던 것인
흥선대원군이며 이미 조선은 전체적인 큰 틀에서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조선도 강력한 세력이 나타나서 급진적으로
근대화를 했어야 했고 아니면 정조가 조금 더 오래 살았어야 합니다.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과 민비, 그리고 고종 사이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과 민비, 그리고 고종은 결국 외세의 힘을 빌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 후기의 근대화를 추진하며,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고자 일본과의 교역 및 교류를 강화하고 일본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의 일본이 세계 각국의 근대화를 선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근대화에 따라 뒤쳐지는 조선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한 것입니다.
반면에, 고종과 민비는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일본과의 교류 및 군사적 지원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외세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국내적인 개혁과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당시 조선 사회의 현실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흥선대원군과 일본의 지원을 받은 군사력과 민비를 지지하는 권력자들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이에 따라 외세의 힘을 빌리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구한말 패망의 시초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전부터 조선은 서구화와 근대화에 대한 대응이 미흡하였으며, 이러한 문제들이 축적되어 구한말 패망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