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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좀합시다
그만좀합시다23.09.21

조선시대에 중전은 어떤 식으로 뽑았나요?

조선시대에 중전을 간택할 때는 어떻게 간택했나요? 간택하는 과정에서 왕의 의사가 반영이 되기도 했나요? 왕의 의사는 배제되고 순전히 내명부에서만 관할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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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전의 후보는 신중하게 선택 했습니다. 우선 ​ 명문집 규수여야 하고, 아녀자가 갖추어야할 부덕을 심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미모를 보고 간택 하였는데요 이렇게 세 가지를 갖춘 처녀를 우선 초간택으로 여러규수들을 뽑은후 재심사를 하여 수를 줄인 후 그 중에서 세명을 골라 뽑았다고 합니다. 물론 내명부의 일이니 내명부의 최고인 왕대비나 대비등이 심사를 했다고 합니다. 원래 사가에서도 당시 결혼 대상은 부모가 골라 주듯 왕비도 왕의 의사 보다는 부모 혹은 조부모인 왕대비나 대비등이 골랐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나 세자가 중전, 세자빈을 간택 하려고 하면 금혼령을 내려 조선에 있는 모든 여성의 혼인을 금지 시켰으며 전국에 있는 사대부가의 자격의 여성들이 사주단자를 올렸습니다.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으로 이루어 지며 초간택은 대비전으로 가서 6~7명씩 조를 이루어 면접을 보며 노상궁들이 꼼꼼하게 파악하여 웃전에 보고 했다고 합니다. 재간택은 초간택에서 뽑힌 여성들을 다시 면접을 보는데 여기서 착출된 최종 3인이 삼간택으로 지정되나 삼간택에 뽑힌 여성들은 이미 왕의 여자라고 간주되어 왕후가 되지 못한 두명은 다른 혼인을 할 수 없어 보통 후궁으로 입궁하거나 후궁이 되지 못하면 평생 독신이 되어야 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에서 왕비는 간택을 통해 왕비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간택제도는 태종 때 시작하여 세종 이후 정착되었다. 그런데 왕비는 대개

    세자빈으로 왕실에 들어오고 남편이 왕위에

    오른 후에 왕비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곧바로 왕비가 되는 것은 왕비가 일찍

    사망하여 계비로 선발되는 경우에 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