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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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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의 탄금대 전투에 대해 알려주세요~

임진왜란에서 지상전 전투 중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는 왜 최악의 전투라고 평가받나요? 탄금대에서는 어떤 경과로 전투가 일어났고, 그 결과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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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개의 답변이 있어요!
    • 블루베리산딸기요거트
      블루베리산딸기요거트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립의 탄금대 전투는 1592년 4월 28일 조선의 장군 신립이 이끄는 군사들이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전투입니다 탄금대 전투는 임진왜란 기간을 통틀어 보기 드물게 조선군이 큰 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야전이었던 데다가 일정한 패턴의 공방을 주고 받는 공성전, 수성전과 달리 진법이 승부를 결정지었던 야전이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패전이라는 점 외에도 주목받을 이유가 많은 전투입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탄금대는 충주의 낮은 구릉지로 임진왜란 당시 1592년 신립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일본군에 맞서 싸워 대패한 전투입니다. 신립 장군은 조령에서 물러나 기병을 평원에서 일전을 준비했습니다. 충주의 서북 4㎞ 지점에 있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앞에 논이 많아 말을 달리기 쉽지 않았습니다. 조선군은 일본의 조총의 모든 공격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결국 기병을 잃은 신립의 본대와 후방병력 일본군에 포위되어 전멸하고 신립 장군은 자결합니다.

      신립의 패보(敗報)가 조정에 전해지자 민심이 극도로 혼란해지고, 국왕은 서울을 떠나 평안도로 피난하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음력 4월 28일 (양력 6월 7일)에 장군 신립 이끄는 조선군이 일본군과 충청북도 충주인 탄금대에서 싸운 전투인데 임진왜란 개전 이후 최초의 대규모 야전이며 이 전투의 패배로 조선 조정은 몽진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름은 탄금대 전투지만 실상 전투는 중반까지 충주천 이남 달천평야에서 벌어졌고 전투 후반에 신립이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했기에 그 임팩트 탓인지 탄금대 전투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탓에 전투가 처음부터 끝까지 탄금대 인근에서만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탄금대 전투는 ‘적을 알지 못하고 자신도 알지 못한’ 무지가 총체적으로 얽혀서 빚어낸 참혹한 패배였다고 합니다. 신립은 일본의 좌우군은 감안하지 못하고 중앙의 고니시군만 신경쓰며 보병은 후방에 둔 채 기병대만 좁고 장애물이 많으며 논밭이 많아 기동에 불리한 평지로 돌격시켜 일본군을 포위하려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장애물이 많게 되면 기병들은 평야에 쫙 펼쳐져서 적을 덮치는 스웜 형태의 기동을 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개의 좁은 길을 따라 종렬로 길게 늘어지는 병목 형태의 기동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리고 이런 밀집은 조총병들의 표적이 되기에 딱이기에 게다가 그 날은 전투 도중 비가 와서 기병으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신립은 기병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충주 탄금대 전투는 1592년 6월 7일 임진왜란 당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한 전투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 부산진성에 이어 동래성마저 함락되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전사하자 조정에서는 대책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저 몇십명만으로 재물이나 약탈하고 간 왜구들과는 차원이 달라서 경상도순변사 이일을 파견했지만 이일을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쳐버려 상주마저 함락되었습니다. 이 전에 선조는 조선 최고 명장으로 추앙받던 신립에게 상방검을 주어 왜구를 막도록 명하였습니다. 이에 신립은 문경으로 출동합니다.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고니시 유기나와 부대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전멸하다시피 하였고 왜구들은 거칠 것 없이 한양으로 진격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