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초기에 전사한 신립 장군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신립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며 여진족 토벌로 용맹을 떨친 맹장이지만 지략이 부족해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전하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무장이라고 하는데요.
신립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은 평산이고 시호는 충장입니다.
1546년 명종 1년에 출생, 아버지는 생원을 지낸 신화국이고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신상입니다. 어린시절부터 글공부 보다 무예를 좋아했다고 하며 1567년 22세때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 경력을 지내고 진주판관이 되었습니다.
1538년 온성부사가 되어 북변에 침입해온 이탕개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고 50여명의 목을 베고 개선, 이후 이탕개가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또 다시 경원부와 안원보를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치며 육진을 방어하는데 공을 세우고 1584년 야인을 물리친 공로로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올랐으며 1587년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해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들이 달아나는 바람에 철수하고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의 탄핵으로 파직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졸병을 참살한 죄로 중추부동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습니다.
1590년 평안도병마절도사에 보직되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쳤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충주로 내려가 방어선을 구축, 왜적의 수가 많고 대적하기 힘든 군사력을 가지고있었지만 후퇴하지 않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북상해오는 왜군과 전투를 벌이지만 군사력의 열세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대군에 포위되어 패배하였고 많은 양민들이 학살되었습니다. 부하 장수인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투신해 자살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