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원자폭탄이 사용된 배경과 원인은 무엇인가요?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사용된 배경과 원인은 무엇이었으며, 이로 인해 어떤 국제 정세와 핵전략의 변화가 일어났나요?
이 사건은 핵무기 개발과 사용에 대한 국제적인 의견과 조치를 어떻게 바꾸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략적인 면과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일본 제국은 1억 총옥쇄를 외치며 끈질길 정도로 저항하였고, 이 저항 때문에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이 두 전투에서 예상 밖의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국은 곧 있을 몰락 작전에 앞서 일본을 압박할 새로운 수단으로써 핵무기를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미국의 정치적 요인도 있었는데, 20억 달러나 되는 거금이 들어간 맨해튼 프로젝트가 아무런 성과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군사 비밀로서 그 사용처가 알려지지 않았던 그 20억 달러를 둘러싼 정치적 후폭풍은 상당할 것이 명백했다. 이에 관련된 정치인들은 국민의 귀중한 혈세로 헛짓거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즉, 선거는 다가오고 있는 마당에 앞선 상륙 작전에서 유권자들의 아들들은 죽어나갔고, 그 와중에 전쟁을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무기를 20억 달러나 들여서 완성했지만 비인도적이라서 쓰지 않았다는 건 당시 유권자들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인류가 거주하는 도시를 대상으로 역사상 단 두번 이루어진 핵무기 투하 사건입니다
1. 원폭 투하가 결정된 배경
일단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입니다.
당시 일제 수뇌부는 소련을 중재자로 하며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는 항복'을 1994년부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훗카이도를 원했고, 미국(+국제연합군)은 지금까지의 희생자를 생각해서라도 일본을 점령한다는 상징성을 가져야 했기에 이 화평은 진전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게, 미국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조건부 항복을 받아들이면(일본은 천황제 유지, 즉 국체 보존을 확정해주지 않으면 항복하지 않겠다는 입장) 당장 다음 선거에서 지지율이 떨어집니다. 미국의 젊은이가 수없이 죽어나갔는데 그 대가로 조건부 항복을 받아냈다 식으로 이야기가 퍼지면... 전쟁에서 이겨도 선거에서 지면 뭐하겠습니까.
같은 이유로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었던 올림픽 작전도 거부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엄청난 격차를 보며 이가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미군은 이오지마 전투나 오키나와 전투를 보고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일본군의 저항은 생각외로 엄청났는데, 미군과 일본군의 엄청난 격차에도 일본군은 덴노 반자이!! 하면서 자살공격을 서슴치 않았고 항복 그딴거 없다! 식으로 정말 격렬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미군이라도 천문학적 피해가 발생할수밖에 없었던 거죠.
미국인들은 이 전쟁을 자신들의 자식의 희생 없이 끝내고 싶어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까요. 때문에 엄청난 규모의 미군을 일본 본토에 상륙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올림픽 작전 또한 엄청난 자국군의 인명피해를 발생시킬 것이 분명하기에, 일정한 성과를 얻어내면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원자폭탄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다만 이 결정은 일본인 입장에서 상당히 다행스러운 것이, 만약 미국이 이 작전을 시행했다면 일본인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다른 나라는 일본인이 전멸한 텅 빈 땅에 누가 들어가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됬겠지요...
2+3. 원폭이 만들어진 배경 / 당대 대통령의 이야기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세계에 알려지게 됩니다. 이 이론은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특정 조건이 갖춰지면 10원짜리 동전도 종래의 의마와는 차원이 다른 폭탄이 될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레오 실라드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한 엄청난 폭탄을 만들 것을 제안하고, 아인슈타인 또한 전쟁을 위한 필요악임을 인정하며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며 남은것은 미국의 지원 뿐이라는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내게 됩니다.
당시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이를 승인하게 됩니다. 자국의 젊은이가 계속 희생되는 상황인 만큼(실리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신무기 개발을 지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시작입니다.
미국은 당시 돈으로 약 20억 달러(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255억 달러라고 합니다. 거진 30조...)를 이 거대 공학 프로젝트에 투자하게 됩니다. 총책임자인 오팬하이머를 시작로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폰 노이만, 리처드 파인만 등 당대 세계 최고의 두뇌들을 모두 이 프로젝트에 투입하게 된 것이죠.
질문자가 말한 '폭탄 자체를 왜 만들었느냐'의 이유는 사실 별거 없습니다.
완성된다면 인류 역사상 비교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아주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은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할 테니까요.
4. 역사상 최강의 무기가 실증되는 상황이므로 미국은 장소 선정을 상당히 고심했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단 한번도 폭격을 받지 않은 대규모 도시를 선정했습니다. 분명 규모가 상당함에도 이상하게 폭격을 한 번도 받지 않았었던 도시로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코쿠라, 니이가타, 교토가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교토에 핵을 떨구는건 미친짓이라 이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를 폭격 장소로 선정합니다.
정확히는 전후 일본을 지배해야 하는데 구 수도인 교토를 날려버리면 일본에 너죽고 나죽자식의 헬게이트가 오픈됩니다. 실제로 미국은 원활한 지배를 위해 천황제를 인정해줄 정도로 실리적인 계산이 미치는 집단이라 아무리 증오에 사로잡혀도 교토에 핵을 떨굴수는 없죠.
여하튼 일단 이런식으로 히로시마에 핵이 떨어지게 됩니다.
히로시마 사람들은 당시 나타난 B-29를 으레 오곤 하던 기상정찰용 비행기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1945년 8월 6일 8시 15분.리틀 보이는 원래 조준점이던 아이오이 다리에서 240미터 벗어난 시마 외과병원의 600미터 상공에서 폭발했습니다.
이를 직접 쳐다본 사람은 눈이 멀게 되고, 수억 도에 가까운 화구가 형성되었으며 폭심지 근처는 3~4천도의 폭열이 발생하여 폭심지 근처는 문자 그대로 삭제되었습니다. 이 주변 또한 엄청난 폭풍으로 엄청나게 튼튼하게 지은 건물을 제외하고는 싸그리 붕괴되었고 당시 현장에 투입된 의사나 간호사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피부가 녹아내린 사람들의 화상치료만 하더라도 약품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방사능에 의해 의사와 간호사조차 90%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건 원자폭탄이 아니라 큰 재래식 폭탄이다!"라 하며 정신승리를 합니다.
일본의 물리학자들은 히로시마를 본 순간부터 '이건 원자폭탄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일본 군부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게 히로시마의 중심부는 말 그대로 삭제되었기에 외곽 지역부터 관찰을 시작했는데, 당시엔 원자폭탄의 위력에 대해서 실증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심지어 미군조차 이렇게 강력할줄은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두껍게 입은 면옷으로 폭발 당시의 열기를 막을 수 있었다' 라던가 하는 낙관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방사능에 의한 2차 피해에 대해서는 제작한 미국 연구진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부수적인 효과였으므로 이러한 자세도 어느정도 이해는 갑니다.
때문에, 이것이 일본을 말려죽였던 미군의 대공습을 아득히 뛰어넘는 무지막지한 피해 살상임은 파악하는데는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일본은 처음부터 미군이 이런 엄청난 공격을 여러번 할 여력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며, 피해상황에 대한 파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일본 상층부는 소모적 논쟁로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게 됩니다.
근데 미국은 처음부터 히로시마 원폭 직후에 무조건으로 항복해오지 않으면 한발 더 쏠 생각이었던 겁니다.
때문에 다음날 바로 두번째 원폭의 발사 준비를 하고...
결국 한발 더 쏩니다.
본래 코쿠라 투하하려 했지만, 구름으로 인한 시계 불량으로 폭격을 할수 없어 나가사키로 선회합니다. 나가사키 또한 구름에 가려진 상황이었지만, 짧은 한순간 구름의 틈으로 나가사키 시가지가 보이는 맑은 지역이 나타났고 그리고 그것이 두 지역민의 운명을 갈랐습니다.
나가사키에서 4만에서 7만에 달하는 시민이 당일 사망했습니다.
다만 위력은 더 강했음에도 구름이나 지형 탓에 피해자가 더 적었던 것이 위안일 뿐이죠.
이후 미군은 원자폭탄 폭격을 중지합니다. 미국은 핵을 통해 일본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여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려는 목적이었으니까요. 게다가 폭탄도 없었습니다. 플루토늄 원폭 기폭용 폭축랜즈는 폭약설계담당자인 키샤코프스키가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만들고 있었고, 플루토늄 추출도 진행중이었으며, 플루토늄 원폭에 필요한 핵기폭기(베릴륨, 폴로늄 등)도 없었으니까요. 우라늄 폭탄 또한 설비 문제로 생산중지 상태.
여하튼 그렇게 지옥의 폭격은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소련은 이 소식을 듣고 한몫 챙기려는 목적으로 만주로 진격하고 일본은 아 망했다 하고 무조건 항복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일본 내부의 과격파가 항복문서 발표한 천황 이거 미친새끼네 하면서 다 죽여버리겠다 뒤집어버린 덕분에 미국이 들어오기 전까지 일본은 별로 평화롭진 못했을겁니다.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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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의 진주만공습 이후 이어진 긴 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음에도 항복을 하지 않자 일본의 투항을 받아내기 위하여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국의 핵물리학자인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입각하여 원자폭탄을 제조에 성공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1945.5월 독일은 항복을 선언했으나 일본은 필리핀에서 연합군과 맞서는 등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미국 트루먼대통령은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합니다. 1945.8.6일 히로시마에 리틀보이를 3일 뒤 나가사끼에 팻맨을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20만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으며 두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국은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강요 했으나 일본은
항복을 하지않아 핵을 사용하였으며,
원폭투하로 인해 전후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지 않으며, 갖지 않으며, 들여오지 않겠다"는 비핵 3원칙을 수용했습니다.
이 항복으로 인해 아시아의 일본 식민지들은 자동적으로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요즘 오펜하이머 란 영화 때문에 핵과 관련된 질문이 많아진거 같습니다. 배경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혹은 일본으로의 원자폭탄 투사건은 1945년, 태평양 전쟁 당시 승기를 잡은 미국이 일본 제국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본 제국의 도시인 히로시마(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건으로, 현재까지 최초이자 유일한 핵무기의 실전 투입 사례입니다.
국제정세의 변화는 관련된 여러가지 제한법이 추후에 생겨나긴 하였으나 미국의 핵무기 개발은 뒤이어 소련의 핵무기 개발로 이어졌고, 이것은 다시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 등 더 위험천만한 무기 개발을 이끌어냈습니다. 냉전하에서 미-소 간 핵 경쟁은 쿠바 사태를 비롯해 몇 차례 핵전쟁 위기로 이어졌다.
오늘날 주요 강대국들이 가진 핵무기는 냉전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보다도 양과 질 모두에서 더 커졌습니다. 미국이 한국에 기항시킨다는 전략핵잠수함의 최대 핵무장력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던 핵폭탄의 5000배가 넘는다고 알려졌습니다.
또한 중국, 영국, 프랑스, 인도, 이스라엘, 파키스탄, 북한 등 핵무기를 가진 국가도 더 많아졌습니다 이것은 어느 한 편에서 벌어지는 국지적 충돌이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대적인 파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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