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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하륜처럼이라고 자주 말하던데 하륜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인생은 하륜처럼이라고 자주 말하던데 하륜은 어떤 사람이었나요...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륜처럼 살아야 된다고 말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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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금킹 시계퀸
      순금킹 시계퀸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하륜은 태종 이방원에 중용되어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기 때문에 훈구파로 볼 수 있습니다.

      하륜의 최고 업적은 태종 이방원을 조선 3대왕에 앉힌 것이죠. 그는 제1 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당문학에 올랐으며, 《동국사략》을 편수하고 《태조실록》 편찬을 지휘하였습니다. 또한 한양천도를 적극 주장 관철시킨 것으로 유명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하륜은 조선 전기 영의정부사, 좌정승,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1347년 태어나 1416년 사망했습니다.

      고려말 과거에 급제해 벼슬로 시작한 인물로 최영의 요동정벌을 반대하다 유배, 새왕조의 도읍을 계룡산으로 정하는 것을 반대하여 중지시켰고 명나라와 표전문 시비 때 명의 요구대로 정도전을 보낼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명에 들어가 납득시켰으며 정도전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제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하여 태종의 총애와 비호를 받았습니다.

      그의 인품은 중후, 침착, 대범했다고 전해집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하씨(河氏)의 조상은 진주(晉州)에서 나와 한 고을의 명망 있는 집안이 되었다. 좌사 낭중(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으로부터 고려에 벼슬하여 현종조(顯宗朝)에 공을 세워 오랑캐를 화친하고 적을 물리쳐 일대의 명신이 되었다. 그 뒤 하탁회(河卓回)는 고종조(高宗朝)에 벼슬하여 사문 박사(四門博士)가 되었고, 박사로부터 사대(四代)가 잇달아 과거에 올라 대대로 명망있는 이들이 나와 경사를 기르고 선행을 쌓아 공에 이르러 가문이 더욱 번창하였다.


      공의 휘는 윤(崙)이요, 자는 대림(大臨)이다. 증조 하식(河湜)은 박사의 5세손으로서, 징사랑(徵仕郞) 선관서 승(膳官署丞)으로 증 순충 보조 공신(純忠輔祚功臣)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 진강군(晉康君)이요, 조(祖)의 하시원(河恃源)은 식목 녹사(式目錄事)에 증 순충 적덕 병의 보조 공신(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정승(議政府右政丞) 판병조사(判兵曹事) 진강 부원군(晉康府院君)이요, 고(考) 하윤린(河允潾)은 봉익 대부(奉翊大夫) 순흥 부사(順興府使)로 증 충근 익대 신덕 수의 협찬 공신(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진양 부원군(晉陽府院君)이다. 비(妣) 강씨(姜氏)는 증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이며, 검교 예빈경(檢校禮賓卿) 증 숭록 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판호조사(判戶曹事) 강승유(姜承裕)의 딸이다. 모두 공이 귀해짐으로 하여 증직이 된 것이다. 지정(至正) 정해년(丁亥年, 1347년 충목왕 3년) 봄에 강씨가 길몽을 꾸고 태기가 있어 그해 12월 기축일(己丑日)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보통 아이와 달랐다. 10세에 배움에 나아가 전수하여 받으면 곧 외웠다. 나이 14세에 경자년(庚子年, 1360년 공민왕 9년)의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였는데, 행촌(杏村) 이 문정공(李文貞公, 이암(李嵒))이 그 시관(試官)이었다. 19세에 을사년(乙巳年, 1365년 공민왕 14년)의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초은(樵隱) 이 문충공(李文忠公, 이인복(李仁復))과 목은(牧隱) 이 문정공(李文靖公, 이색(李穡))이 그 좌주(座主)였다. 문충공이 한번 보고 그릇으로 여겨 곧 그 아우 예의판서(禮儀判書) 이인미(李仁美)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때 두 공(公)은 사문(斯文)의 종주(宗主)가 되어 학사(學士)와 대부(大夫)가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다. 공은 사우(師友) 사이에서 두루 힘쓰며 강론하고 연마하여 학문이 날로 진전되었다.


      정미년(丁未年, 1367년 공민왕 16년)에 춘추관(春秋館)에 뽑혀 들어가 겸열(檢閱)과 공봉(供奉)이 되었다. 다음 해인 홍무(洪武) 원년인 무신년(戊申年)에 감찰사(監察司)의 규정(糾正)을 고시하였고, 기유년(己酉年, 1369년 공민왕 18년)에 감검수사(監檢收司)로서 토지를 측량하였는데, 신돈(辛旽)의 문객으로 부사(副使)가 된 자를 탄핵하였다가 신돈에게 미움을 사 파직되었다. 신해년(辛亥年, 1371년 공민왕 20년)에 신돈이 벌을 받자 기용되어 지영주사(知榮州事)가 되었는데, 안렴사(按廉使) 김주(金湊)가 그 치적과 몸가짐이 제일이라고 아뢰었다. 이듬해 임자년(壬子年)에 불러 고공 좌랑(考功佐郞)에 임명하였고, 계축년(癸丑年, 1373년 공민왕 22년)에 판도 좌랑(版圖佐郞)으로서 교주 강릉도 찰방(交州江陵道察訪)이 되었다. 다음 해 갑인년(甲寅年)에 제릉서 영(諸陵署令)에 제수되고, 을묘년(乙卯年, 1375년 우왕 원년)에 사헌부 지평과 전리 정랑(典理正郞)이 되었다. 이듬해 병진년(丙辰年)에 전교 부령(典校副令)에 올라 지제고(知制誥)를 겸하였고, 전의 부령(典儀副令)으로 옮겼으며, 정사년(丁巳年, 1377년 우왕 3년)에 전법 총랑(典法摠郞)ㆍ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으로 옮겼는데 계속 지제고를 겸하였다. 이로부터 직품(職品)의 제수에 모두 관직(館職)을 띠었다. 또 판도 총랑(版圖摠郞)으로서 교주도(交州道)를 안렴(按廉)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378년 우왕 4년)에 전리 총랑(典理摠郞)으로 옮겼고 이듬해 기미년(己未年)에 전교 영(典校令)에 승진하였으며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이 되었다.

      경신년(庚申年) 9월에 부상(父喪)을 당하였는데, 다음 해 신유년(辛酉年)에 기복 출사(起復出仕)시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으나 상을 마치기를 청하자 윤허하였다. 임술년(壬戌年, 1382년 우왕 8년)에 상을 마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제수되고, 다음 해 계해년(癸亥年)에 우대언(右代言)으로 옮겼으며 곧 전리 판서(典理判書)가 되었다. 갑자년(甲子年, 1384년 우왕 10년)에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 제학(提學)이 되었고, 이듬해 을축년(乙丑年)에 첨서(簽書)에 승진하였다. 가을에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국자 전부(國子典簿) 주탁(周倬) 등을 보내어 왔으므로 공이 서북면(西北面)으로 나아가 영접하였는데, 돌아가게 되자 공이 사표(謝表, 사례의 표문)를 받들고 함께 가니, 주탁 등이 매우 예우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387년 우왕 13년)에 동지(同知)에 오르고, 이듬해 무진년(戊辰年) 봄에 무신(武臣) 최영(崔瑩)이 군사를 일으켜 요양(遼陽)을 범하려 하자, 공이 불가함을 강력히 설명하였다. 최영이 노하여 양주(襄州)로 추방하였는데, 여름에 최영은 패하였고, 공은 돌아올 수 있었다. 기사년(己巳年) 봄에 다시 동지(同知)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이란 자가 일본에서 왔는데, 공은 인척(姻戚)으로서 본래 왕환의 얼굴을 알았으므로 왕환이 아니라고 말하였다가 광주(光州)로 추방되었다. 경오년(庚午年, 1390년 공양왕 2년) 봄에 울주(蔚州)로 옮겼다. 여름에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여러 유배인(流配人)을 청주(淸州)에 모아 놓고 치대(置對, 조사함)하였는데, 공은 벗어나게 되어 진주(晋州)로 돌아갔다. 이듬해 신미년(辛未年) 여름에 기용되어 전라도 도관찰사(都觀察使)가 되었는데, 임신년(壬申年, 1392년 공양왕 4년) 여름에 교체되어 돌아왔다.

      우리 태조(太祖)가 천명(天命)을 받자 다음 해 계유년(癸酉年) 가을에 다시 공을 기용하여 경기좌도 관찰사(京畿左道觀察使)가 되었다. 공은 비로소 민호(民戶)가 경작하는 토지의 다소에 따라 부역(賦役)을 정하였는데 토호(土豪)들은 싫어하였으나 백성들은 그 공평함에 복종하였으며, 여러 도가 모두 본받아 드디어 제도로 정하게 되었다. 이때 태조가 계룡산(鷄龍山)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여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공이 강력히 간하여 이에 따랐다. 갑술년(甲戌年, 1394년 태조 3년) 3월에 다시 첨서 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고, 다음 해 을해년(乙亥年) 4월에 중추사(中樞使)로 옮겼으며, 7월에 모상(母喪)을 당하였는데, 이듬해 병자년(丙子年) 4월에 기복 출사하여 예문 춘추관(藝文春秋館) 학사(學士)가 되어 사양을 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명나라 고황제(高皇帝)가 표문(表文)의 말에 삼가지 않은 내용이 있다하여 우리의 주문자(主文者)인 정도전(鄭道傳)을 불러 입조(入朝)케 하고, 또 우우(牛牛) 등을 보내 독촉하였는데 공은 관반(館伴)이 되었다. 태조는 은밀히 조신들에게 보내야 할지를 물었으나 모두들 머뭇거리며 굳이 보낼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공만이 유독 보내는 것이 편의하다고 하여 정도전이 크게 감정을 품었다. 7월에 태조가 이지(李至)를 보내 아뢰게 하려 하였는데 사신이 말하기를, “하 관반(河館伴, 하윤을 이름)만이 사명(使命)을 다 할 것입니다.” 하고 함께 가기를 청하였다. 공이 명에 가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아뢰어 일이 과연 풀릴 수 있었다.

      정축년(丁丑年, 1397년 태조 6년) 정월에 정도전이 군사를 출동시켜 국경을 나가려고 논의하면서, 공을 꺼려 계림 부윤(鷄林府尹)으로 내보냈다. 그해 봄에 왜추(倭酋) 몇 명이 무리를 거느리고 경상도에 와서 항복할 것을 청하였는데, 4월에 공이 관찰(觀察)ㆍ절제(節制) 등 제공(諸公)과 이 일의 처리를 논의하였으나 주의자(主議者)가 실책하여 왜추가 도망쳤다. 6월에 공 등이 순군부(巡軍府)에 체포되어 치대(置對)하였고, 7월에 수원부(水原府)에 안치(安置)되었으며, 10월에 풀려날 수 있었다. 무인년(戊寅年, 1398년 태조 7년) 7월에 충청도 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9월에 상황(上王, 정종(定宗))이 왕위를 잇자, 불러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임명하였으며, 10월에 정사공(定社功)을 책록(策錄)하였는데, 공이 1등이 되어 진산군(晉山君)의 봉작을 받았고 명나라에 들어가 건문 황제(建文皇帝, 명 혜제(明惠帝))의 등극을 축하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399년 정종 원년) 12월에 참찬 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가 되었다. 이듬해 경진년(庚辰年) 4월에 찬성사(贊成事)에 오르고, 5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겸 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가 되었으며, 9월에 문하 우정승(門下右政丞)에 임명되어 판병조사(判兵曹事)가 되고 봉작이 올라 진산백(晉山伯)이 되었다. 11월에 금상(今上, 태종)이 즉위하였다. 신사년(辛巳年, 1401년 태종 원년) 정월에 좌명공(佐命功)에 책록되었는데 공이 또 1등이었다. 윤3월에 병으로 사퇴하니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임명되었고, 4월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지금의 지신사(知申事) 조말생(趙末生) 등 33인을 뽑았으며, 7월에 관제(官制)가 고쳐지며 이어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겸 판호조사(兼判戶曹事)가 되었고 비로소 경내(境內)에 통행하는 저폐(楮幣)를 만들어 나라의 용도를 넉넉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임오년(壬午年, 1402년 태종 2년) 6월에 명나라에 가 명명 악장(明命樂章) 한 편을 받았는데, 교서(敎書)를 내려 장려하였다. 10월에 의정부 좌정승(議政府左政丞)에 임명되어 판이조사(判吏曹事)가 되었고 명나라에 들어가 금상 황제(今上皇帝, 명 성조(明成祖))의 등극을 축하하였는데,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첨(李詹)이 부사(副使)가 되었다. 공은 명나라에 도착하여 이공(李公)과 같이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새 천자가 등극하여 천하가 새로워졌으니, 우리 임금의 작명(爵命)도 고쳐 주기 바란다.” 하니, 황제가 아름답게 여겼다. 영락(永樂) 원년인 계미년(癸未年, 1403년 태종 3년) 4월에 명나라 사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과 함께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오니, 임금이 더욱 귀하게 여겨 하사한 물건이 매우 후하였다.


      다음 해 갑신년(甲申年) 6월에 가뭄으로 면직(免職)할 것을 청하였고, 을유년(乙酉年, 1405년 태종 5년) 정월에 다시 좌정승이 되면서 세자사(世子師)가 더해졌다. 이듬해 병술년(丙戌年)에는 공이 각 종파(宗派)의 절 주지(主持)들이 전토와 노비를 많이 점유하고서 재산을 증식시키고, 여색에 빠져 재물을 좀먹고 대중을 미혹시킨다고 건의하여 각도의 주(州)와 군(郡)에 한두 절만 남기고 모두 철거하고, 그 전토와 노비는 나라에 귀속시키게 하자 임금이 이에 따랐는데, 식자들은 이를 통쾌하다 하였다.


      정해년(丁亥年, 1407년 태종 7년) 4월에 문사(文士)들을 중시(重試)할 때, 공에게 시권(試券)을 읽도록 하였고 지금의 예문관 제학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7월에 또 가뭄으로 임금의 처소를 옮기기를 청하였다. 무자년(戊子年, 1408년 태종 8년) 2월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고, 3년 뒤 신묘년(辛卯年) 3월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지금의 평양 판관(平壤判官) 권극중(權克中) 등 33인을 뽑았다. 임진년(壬辰年, 1412년 태종 12년) 8월에 다시 좌정승이 되니, 공은 이에 네 차례나 국권을 잡은 것이다.

      2년 뒤 갑오년(甲午年) 4월에 국가에서 주관(周官)의 제도에 따라 정부의 모든 사무를 나누어 육조(六曹)에 귀속시키고 공을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삼았다. 을미년(乙未年, 1415년 태종 15년) 10월에 또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신년(丙申年) 봄에 공의 나이 70세였으므로, 고사(故事)에 따라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임금은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자 공이 자주 고하니, 임금이 특별히 우대하여 조회에는 나오지 않게 하다가, 4월에 가서 윤허하였고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사제(私第)에 나아가도록 하였으나,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자문하였다. 그해 10월에 임금이 함길도(咸吉道)로 사신을 보내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두루 살피려 하자 공이 자진하여 갈 것을 청하였다. 임금은 그의 늙었음을 가엾게 여기면서도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친히 교외에 나아가 전송하였다.


      공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려 할 때 병이 났는데, 임금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내의(內醫)를 보내 치료하게 하고, 내주(內廚)에서 반찬을 조리하게 하였으며 문병하는 중관(中官)이 길에 잇달았다. 11월 초6일 계사일(癸巳日)에 정평(定平)의 공관(公館)에서 졸하였다. 부고가 이르자 임금께서 애도함이 심하여 곡하며 눈물을 흘렸고, 3일 동안 조회를 폐하였으며 7일 동안 소찬(素饌)을 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교서를 내리고 치제(致祭)하였다. 또 유사에게 명하여 상구(喪柩)를 보호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하였고, 서울 집에 빈소를 차리자 임금과 세자가 몸소 임하여 조문과 제전을 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으며 관에서 특별히 장례를 돕게 하였으니, 공의 슬픈 일과 영예로운 일에 유감이 없다고 하겠다. 이듬해 정유년(丁酉年, 1417년 태종 17년) 3월 11일 정유(丁酉)에 사자(嗣子) 도총제공(都摠制公)이 관을 받들고 돌아가 진주(晉州) 동방동(桐房洞) 감산(坎山)의 언덕 선영 동쪽에 붙이어 장사 지내니, 평소의 명에 따른 것이다.

      공은 천품이 중후하고 식견이 밝고 도량이 넓으며, 조용하고도 간소하여 평생 급한 말이나 갑자기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었다. 단정히 묘당(廟堂)에 앉아 의심되는 일을 결단하고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그 기품이 씩씩하여 조금도 비방과 칭찬에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대체(大體)의 유지에 힘썼고 까다롭게 살피지 않았으며, 아름다운 정책과 은밀한 의견으로 보좌한 공이 컸고, 물러나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는 일이 없었다. 몸가짐이나 사람을 대할 때에 한결같이 정성스러웠고 거짓이 없었으며, 종족에게는 어질고 벗에게는 미더웠으며, 아래로 노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은혜를 생각하였다. 인재를 추천함에 늘 부족한 듯이 하였고 작은 선(善)도 반드시 취하고 그 작은 허물은 덮어 주었다. 집에 있어서는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았고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잔치와 놀이를 즐기지 않았다.


      성품이 글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고 여유 있게 시가(詩歌)를 읊조리며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다. 경사자집(經史子集)을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음양(陰陽)ㆍ의약(醫藥)ㆍ성경(星經)ㆍ지리(地理) 등에 있어서도 모두 극히 정밀하였으며, 예악(禮樂)과 제도(制度)도 모두 공이 상정(詳定)하였다. 후생(後生)을 권면하고 의리를 논의함에 매우 부지런하였고, 국정을 담당하면서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 외교의 사명(辭命)과 문사(文士)의 작품이라도 반드시 공의 윤색(潤色)과 인가(印可)를 거친 뒤에 정하였다. 일찍이 어명을 받아 ≪태조실록(太祖實錄)≫ 15권을 수찬해서 올리었다. 스스로 호를 호정(浩亭)이라 하였고 문집 약간 권이 있다. 미리 유서(遺書)를 써 상자에 간직하였는데, 자손을 훈계함에 있어 자세하여 빠짐이 없었고, 또 상장(喪葬)에 있어 일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르고 불사(佛事)를 없도록 경계한 것이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 유서가 나왔으므로, 집안에서 그 말과 같이 하였다.


      부인 이씨(李氏)는 지금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작되었다. 아들 하나를 낳아 하구(河久)인데, 벼슬이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이다. 딸 둘이 있는데, 맏이는 한성 부윤(漢城府尹) 홍섭(洪涉)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경상좌도 도절제사 이승간(李承幹)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1인 하복생(河福生)은 어리고, 외손 다섯은 모두 도절제사의 아들인데, 이공전(李恭全)은 전(前) 공정고 부사(供正庫副使)요, 이신전(李愼全)은 사재 직장(司宰直長)이며, 다음은 이성전(李誠全)ㆍ이안전(李安全)ㆍ이항전(李恒全)이다. 공의 서자 셋인데, 하장(河長)과 하연(河延)은 모두 어리고, 하영(河永)은 의흥시위사 대호군(義興侍衛司大護軍)이다. 서녀(庶女) 셋에 맏이는 곡산 부사(谷山府使) 김질(金秩)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군 사직(中軍司直) 장희걸(張希傑)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진산(晉山)은 푸르디푸르고 진수(晉水)는 깊고도 넓은데, 아! 땅의 신령스러운 기운 받아서 우리 호정(浩亭)을 낳았구려. 선생의 자질은 옥처럼 윤택하면서도 견실하고, 시원스러운 흉금은 비 갠 뒤의 달빛과 바람이라. 하늘이 동방(東方)을 돌보아 우리 임금을 돕게 하였는데, 말과 계책을 들어주어 천년에 한번 만나는 기회였었네. 이에 공을 정승으로 삼아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였네. 공은 종묘사직에 있고 은택은 궁한 백성에게 미쳤다오. 이단(異端)을 배격하고 도학(道學)을 창도하였다네. 공은 이때에 당(唐)의 창려(昌黎, 한유(韓愈)임)가 되어 두 조정을 정책(定策)하여 친히 임금을 도왔으며, 송(宋)의 치규(稚圭, 한기(韓琦)의자)가 되어 미리 병기(炳幾)에 밝아 계책에 빈틈이 없었다오. 누구와 비슷하겠는가? 장막 속의 (한(漢)의) 자방(子房, 장량(張良)의 자)처럼, 충의와 정성이 위로 해를 꿰뚫었다오. 누구와 하겠는가? 한평생 (당(唐)의) 분양(汾陽, 곽자의(郭子儀)의 봉호)처럼, 사업은 넓고 덕은 높아 나라의 원로(元老)라네. 칠순에 생을 마치니 어찌 장수라 하랴만, 팔과 다리 없어지니 임금이 슬퍼하네. 철인(哲人)이 돌아가니 길의 나그네도 눈물 짓는다오. 아! 선생은 이제 세상을 떠났으나, 이름은 훈적(勳籍)에 남기고 신(神)은 고향으로 돌아갔네. 울창한 선영(先塋)에 체백(體魄) 영원히 묻고서 지석(誌石)에 명(銘) 새겨 길이 보이리.

      출처 : 국역 국조인물고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요즘으로 보면 대세를 따라 줄타기를 하는사람이었습니다.
      이방원에게 붙어서 살아남았다고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다면 이방원에게는 하륜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륜은 정몽주, 정도전등과 함께 이색의 제자 였다고 합니다. 풍수지리나 역학에도 능해 이방원이 왕이 될것을 인식하고 그의 장자방이 됩니다. 태종이 즉위 하면서 많은 부귀와 권력을 누리고 살다가 70세에 평온히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