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조소앙선생님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얼마전에 티비 프로그램을 보다가 조소앙 선생님의 이름을 잠시 봤는데 무슨 업적을 하신건지는 안알려주더라구요
업적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소앙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자 한국 독립당의 간부였으며 본명은 조용은, 호는 소앙, 본관은 함안입니다.
1902년 상경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고 신채호와 함께 일본에 대한 황무지 개척권 양도에 반대하여 성토문을 작성하였고, 졸업 후 황실특파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04년 일본으로 가 학교를 다녔지만, 교장의 한국 학생들은 열등하다는 발언에 항의하며 동맹파업을 주도하였습니다.
1908년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으며 공수학회와 대한흥학회 간부로 유학생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1909년 12월 일진회 성토문 기초 위원으로 선정되고, 1919년 8월 대한흥학회 차원에서 추진한 한일합방 반대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체포되기도 합니다.
1911년 조선 유학생 학우회 회장을 맡고 요시찰 인물로 보여 감시를 받았으며 1910년 전후해 나라를 빼앗기자 조소앙은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기독교 입교, 종교및철학관련 서적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조소앙은 유교, 불교, 기독교 등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통합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겠다는 목표를 갖게됩니다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가던 이승만이 도쿄에서 강연하던 것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신익희, 윤치영, 여운홍 과 활동하며 1912년 3월 메이지대학을 졸업 후 귀국하여 경신학교와 양정학교 교사로 활동하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합니다.
상하이에서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과 함께 동제사 를 조직해 가입하여 박달학원 교사로 황동하고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박용만,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 14명의 명의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을 기초로하였으며, 1919년 1월 2.8독입선언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일본 도쿄에 도착하여 재일본 한국인 유학생들을 만나 신한 청년당 대표 김규식이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되었음을 알립니다.
본국으로 가기전 도쿄 유학생들을 만나 2월8일 독립운동을 하기도 결정한 통보를 접수하고 일본에서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 800원을 조소앙에게 위탁하여 상하이로 보냅니다.
1919년 2월 지린성으로 가 여준, 박찬익 등과 대한 독립의군부를 조직, 대한독립선언서 제작, 배포하는데 조소앙은 대한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는 책임을 밭았으며 지린성에 있던 중에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며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집결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1919년 4월 초 지린성에서 상하이로 갑니다.
1919년 4월 조소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 의정원법 기초위원과 임시헌장기초위언으로 선정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한성에서 기의, 국내의 3.1운동에 기초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했다고 밝히고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총이 선임 문제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사건 문제로 나가가지 못하자 조소앙은 후보자3인을 추천, 3인의 후보에 대한 무기명 투표방식을 제안하여 선거가 실시되고 그 결과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선출되었습니다.
1915녀 5월 조소앙은 유럽으로 가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의 활동을 지원하려하였으나 그가 런던을 경유하여 파리에 도착한것은 6월말로 이미 파리 강화 회의가 종결된 후였습니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유럽 각국을 순방하며 한국의 독립운동 선전 활동을 전개하고 1919년 7월 스위스에서 개최되는 만국 사회당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3년 전 조선 사회당 명의로 한국 독립지원을 요청했던 사실을 밝히고 대회 참석과 발언을 요청하는 문서를 보냈고 만국 사회당 대회 비서장 명의의 참가 승인 전문을 받고 조소앙은 이관용과 함국 사회당 대표로 참가하였습니다.
이 대회에서 한국 독립 승인 결의안을 제출하고 대한 민국 임시정부가 미국식의 자본주의나 소련식의 공산주의가 아닌 삼균주의와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여 결의안은 25개국 대표들의 협의를 거쳐 8월9일 통과되며 한국의독립이 국제 회의에서 최초로 승인을 받습니다.
1920년 3월 조소앙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 사회당 집행위원에 참석하고 유럽에서 외교활동을 벌이며 그의 활동은 상하이의 독립신문을 통해 알려집니다.
1920년 초중반 조소앙은 유럽 각국을 순방하며 외교활동을 전개,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두기도했으며 영국, 덴마크, 벨기에, 에스토니아 등을 거쳐 1920년 11월부터 1921년 5월까지 소련을 다니며 페트로그라드에서 개최된 11월 혁명 기념 대회와 모스크바 공산당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공산당을 독립당과 함께 주의에 의거하여 수립된 진일보한 정치세력으로 간주, 독립운동을 위해 공동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습니다.
1921년 말 상하이에서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1922년 6월 임시정부 임시 의정원의 경기도 출신 의원으로 선출되어 임시 의원장 의장이 되었는데 당시 임시정부 내부를 비롯해 독립운동 진영은 이념과 파벌 대립으로 극심히 분열되어 지도력이 약화되어있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열립니다.
이 회의에서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 새로운 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창조파가 의견이 대립되어 결론을 내지 못하자 조소앙은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며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습니다.
1925년 3월 이승만이 탄핵되어 면직되고 4월에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뀌는 개혁이 단행되고 조소앙은 이러한 개혁에 대해 반대하며 이승만 재집권을 위한 운동을 전개, 하와이에 있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쿠테타를 건의합니다.
1920년 중반 중국관내 지역의 독립운동은 침체기에 빠지고 이념과 지역대립으로 분열된 독립운동 진영을 통일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고, 1927년 3월 한국 유민족 유일당 운동은 베이징, 광저우,우한, 난징 등으로 확대되지만 이념과 방법 상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였습니다.
1930년 1월 조소앙은 안창호, 이동녕, 김구 등 민족주의 인사들과 한국독립당을 결성, 발기위원으로 참여,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었으며 당의 당강기조위원으로 선정되어 삼균주의에 의거한 정강과 정책을 기초하였습니다.
1931년 1월 한국 독립당 근상이라는 논문을 통해 삼균주의 이론체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으며,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항저우 ,난징으로 옮길때 조소앙도 함께 가며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임, 내무총장을 맡습니다.
그는 김철, 김두봉과 함께 한국 독립당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1935년 김원봉을 중심으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조소앙은 참여한 뒤 탈당합니다.
그는 정강, 정책기초위원으로 참가하여 삼균주의를 민족혁명당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하도록 하였으나 3개월 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계가 중심이 된것에 불만을 품고 탈당하여 다시 한국독립당으로 입당합니다.
조소앙은 김원봉이 삼균주의에 공감했던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주장하는 삼균주의가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1941년 대일본 선전포고문, 대한민국 건국강력을 작성,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독립외교를 전개, 임시정부를 국제사회로 승인받이 위해 활동했으며, 전후 한국에 대한 국제 공관론, 신탁통치안이 국제사회에서 거론되자 그는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연합국의 신탁통지 방안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합니다.
1945년 광복 후 김구와 함께 이승만의 귀국을 돕고, 환영회도 열었습니다.
1946년 3월1일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한 육성 연성을 디지털로 복원한것을 조소앙기념사업회에서 공개하고, 한국독립당 요인으로 국내 정치에 참여하게되며 해방 정국 동안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1946년 12월 전 서울지역 대의원 가격으로 남조서과도입법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사퇴하고, 1948년 말 한국독립당을 탈당해 자신만의 정당인 사회당을 결성합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출마해 조병옥을 상대로 당선되고,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 촉진 협의회를 조직하여 최고위원을 합니다.
납북 인사 중 최고의 인사로 김일성과 직접 면담,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같이 활동했던 김두봉과 김원봉이 그를 지원하였으며, 북한정부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주장하는 중립화 통일론 통일 방안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1958년 9월 엄항섭, 명제세, 노일환 등에게 반혁명분자의 혐의를 씌우고, 조소앙은 이에 항의하여 단식투쟁을 벌이다 병을 얻어 1958년 9월10일 평양 남산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병사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조소앙. 그는 민족운동의 정신적 기틀이 된 삼균주의 사상을 창안했으며, 임시정부에서 외교와 정책 실무를 책임진 사상가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주창한 삼균주의는 1941년 임시정부의 기본이념이자 정책노선으로 확정된 데 이어 해방 후 대한민국의 헌법에도 반영됐다.
조소앙 업적
1. 독립 운동과 3.1 운동 참여
2.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 참여
3. 유럽에서 독립운동
4. 민족 유일당 운동 참여와 삼균주의 이론 정립
5. 한국광복군 창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치인 조소앙선생은 1887년 경기도파주에서 출생하시어 일본으로 유학가서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서 경신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시다가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1945.8.15해방과 동시에 귀국하여 김구와 함께 정치활동을 하시다가 1950.5.30국회의원이 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북으로 납북되어 1956.7월에 국제간첩으로 몰리어 숙청,투옥되어다가 58년에 사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