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반정으로 폐위 되고 나서 상당히 건강하게 장수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조선의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보위에서 물러났지만 유배를 갔어도 심리적으로 안정적으로 건강하게 상당히 장수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이것이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은 강화도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인조가 즉위한 지 19년 즉 유배 생활 19년 만에 제주도에서 숨을거뒀습니다.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네, 맞습니다. 광해군 이혼은 연산군 이융과 다르게 폐위된 후에도 천수를 누렸으며, 이는 소위 광해군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시도 등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광해군은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수명으로만 따지면 조선 역대 국왕 중 네 번째로 장수한 임금이다.
이렇듯 광해군이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은 이미 이이첨, 기자헌 정인홍 유희분, 박승종, 유몽인, 임취정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 영수들이 대부분 숙청으로 죽어서 그의 세력에 대해 거의 씨를 말렸기 때문이고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유교 예법상 세자때부터 30년을 군주로 섬긴 광해군을 죽이는건 시해(弑害)이기 때문이다. 왕이 패륜을 저질러서 신하들이 왕을 내쫓을 수는 있으나 죽일수는 없다는 것은 유교 고전에서 걸주 임금 뿐만 아니라 조선조 중종 반정때 연산군의 예가 있다. 실제로 폐위를 주도한 서인들도 광해군 폐위의 근거로 선조독살설을 넣거나, 또는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것에 절대로 반대했다.다른 의견으로는 이미 광해군은 10년에 걸쳐 민심을 잃었기에 복위의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유교의 예법으로도 '폭군을 내치는 법은 있어도 주륙하는 예는 없다' 는 것이었고 인륜을 기치로 든 인조 정권이 광해군을 죽일 경우 반정의 명분이 꺾일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폐주'라고 해도 죽여버린다면 인조의 반정 명분에 크게 흠을 입게 되는 것이라 폐위시키는 선에서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 게다가 연이은 전쟁에서의 패배로 무능하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던 당시 인조가 광해군을 죽인다는 것은 한마디로 자신의 지지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목을 베고 살을 씹겠다."란 말을 했을 때도 이들은 계속 말리며 반대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은 재위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들을 대상으로 수차례 옥사를 일으켰고, 특히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은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또 후금과 명 사이에서는 실리외교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행위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서인 주도의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해 폐위되었다. 광해군은 1623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으며, 1641년에 사망하였다.
출처 : 시사상식사전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1641년 8월 7일)은 조선의 제15대 국왕(재위: 1608년 ~ 1623년)입니다. 그는 34세 왕위에 오르고 15년간 통하다가 49살에 대군으로 강등 당하고 유배지에서 18년간을 더 살다가 66세에 사망 합니다. 당시에 66세를 살았으면 장수 한 것에 해당 하니 아마도 왕위를 내려 놓고는 심신적으로 평안 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