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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천사1004
Jy천사100423.08.23

안시성 전투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고구려 후기때 양만춘 장군이 이끄는 안시성 전투가 고구려 방어에 큰힘이 된것으로 아는데 어떤 경로를 통해 이겼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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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45년(보장왕 4) 고구려가 당나라 군대와 안시성에서 벌인 공방전입니다.

    이 전투의 경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암성 함락 후 당군은 수뇌부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여 다음 공격목표를 안시성(지금의 해성 동남 영성자산성에 비정하는 것이 통설임)으로 정하고, 6월 20일 안시성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고구려에서는 이에 맞서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말갈 군사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게 하였다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군을 가볍게 보고 성급하게 정면대결을 벌이다가 당군의 포위공격을 당했으며, 결국 살아남은 3만 6,800명의 군사와 함께 항복하였습니다.

    안시성 구원군의 군세에 두려움을 금치 못했던 태종은 뜻밖의 놀라운 전과를 올리자 이는 하늘의 도움이라 하여 승리에 도취했고, 그 여세를 몰아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고구려는 안시성 구원군이 패배한데다가 남으로는 신라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또 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 설연타(薛延陀)와 제휴하여 당을 견제해 보려는 외교적 노력마저 실패함으로써 안시성 지원능력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안시성은 완전히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당은 60일에 걸쳐 성의 동남쪽에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성벽보다 높게 토산(土山)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면서 성벽의 한쪽 귀퉁이가 부서지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안시성의 고구려군이 토산 아래에 땅굴을 파서 토산을 무너뜨렸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음) 고구려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무너진 성벽 사이로 빠져 나와 토산을 점령하였습니다.

    당은 토성을 탈환하기 위해 3일간 극렬한 공격을 폈으나 실패했으며, 그 결과 당의 작전은 전반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겨울이 되어 날씨도 추워지고 군량마저 떨어졌으므로, 당은 할 수 없이 88일간의 포위를 풀고 그 해 9월 18일 서둘러 퇴각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영류와을 폐위시켜 살해하고 보장왕을 등극시킨데 대한 불만으로 하극상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출병하여 고구려를 복속시키려 했으나 고구려는 당의 침입에 대비해 천리장성을 구축하였고 당나라 군대가 진격하지 못하도록 대비를 잘하고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돌바를 시도하다 안되어 안시성을 공략하는데 안시성에는 양만춘장군이 있었습니다. 당의 대군을 맞아서 끝까지 항전하고 있었는데 성벽진격을 못하니 당군을 성보다 더 큰 흙으로 토성을 만들어 안시성이 위태로웠는데 약싹빠른 자들이 토성을 지탱하는 버팀목을 무너뜨려 거대한 토성이 무너짐으로써 안시성전투에서 고구려가 대승을 거둡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시성의 위기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당은 고연수 등을 앞세워 항복을 권유하는 한편 당시 가장 위력적인 성공격무기였던 포거와 충거를 동원해 안시성을 공격하나 안시성측은 이를 번번이 물리쳤고, 무너진 성벽도 빨리 수리하는 등 확고한 자세로 방어에 임합니다.

    안시성의 이 같은 완강한 저항에 당황한 당은 태종의 본영을 여러번 바꾸어가면서 , 안시성을 함락하는 날 남자들은 모두 죽이겠다고 공언하며 안시성 공격에 더욱 박차를 가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고연수의 건의에 따라 안시성을 그냥 두고 동쪽으로 이동해 방비가 약한 오골성을 점령한 다음 곧장 평양으로 진공하자는 논의까지 하게 되나 천자가 친히 싸움터에 나왔으니 안시성을 뒤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험은 할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당의 안시성 공격은 계속 강행됩니다.

    장량이 이끄는 수군의 건안성 공격마저 교착상태에 빠지자 초초해진 당은 이 싸움을 빨리 마무리 하기 위해 이세적으로 하여금 하루에도 6,7회씩 성의 서쪽을 공격하게 됩니다.

    당은 60일에 걸쳐 성의 동남쪽에 연인원 50만명을 동원해 성벽보다 높게 토산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 그러나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면서 성벽의 한쪽 뒤퉁이가 부서지는 사태가 발생, 고구려군은 이 틈을 이용해 무너진 성벽 사이로 빠져나와 토산을 점령합니다.

    당은 토성을 탈환하기 위해 3일간 극렬한 공격을 폈으나 실패했으며 그 결과 당의 작전은 전반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겨울이 되어 날씨가 추워지고 군량마저 떨어졌으므로 당은 할수없이 88일간의 포위를 풀고 그 해 9월 18일 서둘러 퇴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