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가 프랑스 사람이 아닌가요?
알베르 카뮈가 프랑스출신 작가라고 알고있었는데 프랑스태생이 아니라 알제리 태생이더라구요. 알제리에서 태어났는데 왜 프랑스작가라고 불리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설가, 철학자, 신문기자 알베르 카뮈는
1913. 11. 7. 알제리에서 출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60. 1.4일에 사망하였습니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알베르 까뮈를 알제리 태생으로 보는 관점은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시점으로 보는 오류때문이고 알베르까뮈가 태어나는 시점에는 알제리는 프랑스의 확장된 영토의 개념이었고 까뮈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프랑스인이며 프랑스에서 확장된 영토인 알제리로 이주해갔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알제리는 프랑스령 알제리 콩스탕틴 주 몽도비 출생으로 현 알제리 엘타르프주 알드라안 입니다.
프랑스령 알제리 태생이라는 사실에 알제리 아랍계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알제리 및 이슬람계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단순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의 확장된 영토로 취급, 당시 프랑스 본토로부터 새로운 땅에서의 기회를 노리고 이주한 프랑스인들이 많았으며 카뮈의 아버지나 어머니도 그중 일부였습니다.
카뮈가 태어날 당시의 알제리는 그저 프랑스라는 국가의 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그는 프랑스 태생이었습니다.
카뮈기 알제리 태생이라는 것은 카뮈가 사망한 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현재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순수 프랑스인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프랑스령 알제리 태생의 알베르 카뮈는
태어날 당시의 알제리가 그때 당시
프랑스라는 국가의 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그는 프랑스 태생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프랑스령 알제리 태생이라는 사실에 알제리 아랍계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알제리 및 이슬람계와는 관련이 없다.[8] 프랑스는 알제리를 단순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의 확장된 영토로 취급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 본토로부터 새로운 땅에서의 기회를 노리고 이주한 프랑스인들이 많았으며, 카뮈의 아버지나 어머니[9]도 그 중 일부였다. 카뮈가 태어날 당시의 알제리는 그저 프랑스라는 국가의 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그는 프랑스 태생이었다. 카뮈가 알제리 태생이라는 말은, 카뮈가 사망(1960)한 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1962)한 현재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10] 즉,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순수 프랑스인이었으며,[11][12] 현재의 알제리 아랍인과는 거의 무관한 인물이다.
출처 : 나무위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알베르 카뮈는 1913년 11월 7일에 프랑스령 알제리 콩스탕틴 주 몽도비에서 태어났고, 1960년 1월4일 프랑스 부르고뉴 욘주 빌블르뱅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많은 식민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알제리는 단순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의 확장된 영토로 생각할만큼 각별하여 프랑스 사람들이 본토로부터 기회의 땅이라고 많이 이주하였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부모도 그랬습니다.
현재의 시점에서는 알제리는 독립 국가이기 때문에 알베르 카뮈가 알제리 지역에서 태어났으니 알제리 사람 아닌가 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애초에 프랑스 국적을 가진 순수한 프랑스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여 운영하였지만, 당시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우리 땅에서 자녀를 낳았고, 국적도 일본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대한민국이 독립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한국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알제리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알제리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생활하고 활동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도 알제리 출신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알베르 카뮈는 1913년 11월 7일 알제리 몽드비에서 출생하였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아버지가 마른 전투에서 전사하자, 귀머거리인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빈곤 속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L.제르맹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큰 영향을 받았으며, 고학으로 다니던 알제대학교 철학과에서는 평생의 스승이 된 J.그르니에를 만났다. 결핵으로 교수가 될 것을 단념하고 졸업한 뒤 신문기자가 되었다.
대학시절에는 연극에 흥미를 가져, 직접 배우로서 출연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작품 《표리(表裏)》(1937) 《결혼》(1938)은 아름다운 산문으로, 그의 시인적 자질이 뚜렷이 보이며, 이때 이미 인간의 조건에 대한 고민, 존재의 부조리성(不條理性) 문제 등이 서정적인 에세이풍으로 서술되었다.
1942년 7월, 프랑스는 독일군 점령하에 있었는데, 그의 문제작 《이방인(異邦人) L’étranger》(1942)은 발표되자, 칭송과 함께 그를 일약 문단의 총아(寵兒)로 만들어 놓았다. 《이방인》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로 살다가, 살인죄를 범하고 사형을 선고받은 사나이가 세상에서 버림받고 죽음에 직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의미와 행복을 깨닫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부조리성과 반항의 의욕을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 《시지프의 신화(神話)》(1942)이다.
《이방인》이 부조리의 사상을 ‘이미지’로써 펼쳐 보인 것이라면, 《시지프의 신화》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신화상의 인물 시지프(시시포스)처럼 인간은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살아야 하는 숙명임을 강조하였다. 희곡 《오해(誤解)》(1944) 《칼리굴라 Caligula》(1945)에서도, 부조리한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어내는 일의 어려움을 역설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 《콩바》지(紙)의 주필로서 레지스탕스의 필봉(筆鋒)을 들었다.
사르트르는 “나보다도 카뮈가 훨씬 더 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회고한 일도 있다.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1945)는 전시 중에 썼던 4편의 서간형식의 ‘독일인론(獨逸人論)’으로서, 편협한 애국심의 폐해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그 후 《페스트》(1947)는 그의 명성을 더욱 빛내주었으며, 이것은 점령군에 대한 저항을 암시하면서 페스트의 유행과 싸우는 선의(善意)의 사람들의 행동을 단순 명쾌한 문체와 힘찬 필치로써 그렸다. 희곡 《계엄령》(1948)은 《페스트》의 주제를 극화한 것이다.
시사평론을 쓰면서 연극을 상연하여 청년층의 인기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그를 실존주의자로 보는 세상 사람들과 매스컴에 대해서는 항상 그것을 부정했으며, “실존주의가 끝난 데서부터 나는 출발하고 있다”라고 그는 언명하였다. 그러므로 《반항적 인간》(1951)을 둘러싸고 사르트르와 논쟁을 벌여 10년 가까이 맺어온 우정에 파탄이 갔다는 사실이 뜻밖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희곡 《정의(正義)의 사람들》(1949) 속에서 열렬히 변호되는 제정 러시아의 혁명당원의 행동을 주제로 한 에세이인데, 형이상적(形而上的)·역사적·예술적 반항의 역사를 서술하고, 혁명적 수단과 유물사관(唯物史觀)에 반대하여, 점진적·개량적인 중용의 방법을 주장한 것이다.
그로부터 4년 후에 발표된 《전락(轉落)》(1956)은 깊은 내성(內省)에서 우러나온, 어두우면서도 순수한 반짝임을 지닌 걸작으로, 사르트르도 절찬하였다. 이 동안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해서도, 알제리에 거주하는 친척과 친지 들을 생각하여 정치적 발언을 일체 삼가는 태도를 고수하였다. 정치참여에서 정관주의(靜觀主義)로 처신을 바꾼 것으로 여겨지기는 하나, 그 침묵의 배후에 영혼의 격렬한 갈등과 고뇌가 없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고 나서, 최초의 본격적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