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는 유교사회가 아닌가요?
당나라를 보면은 당고종이 아버지의
후궁을 황후로 삼고 당현종은 며느리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유교사회에는 황제라도 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당대의 종교 문화는
황실에서 숭배된 도교와
민중과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한
불교와의 대립과
공존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춘추시대 노나라 공자에 의해 창시된 유교사상은 전국시대 맹자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으나 중국을 천하통일시킨 진나라의 시황제가 농서 복서 등을 제외하고 모든 유교경전을 불사르고 460여명의 유학자를 묻어버리는 분서갱유 사건을 저지른 이후 한나라때에는 훈고학과 경학을 복원시키면서 유학을 국학으로 삼았기때문에 그 이후인 당나라때에는 유교를 중시하는 사회가 전개되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유교적 입장이 확실히 갖춰지기 이전이기에 혼란스러움이 있을 수 있으나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잡은 자들은 전횡을 저지르고 살기때문에 어떤 질서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은 유교사회입니다. 한, 당, 송, 명 모두 유교사회입니다. 따라서 황제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지만 그런 비판을 감수하고 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현종은 양귀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유교사회에서는 가장 귀중한 가치로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왕실에서도 가문의 연속성과 상속권 등을 중시하여 후계자를 결정하고,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후궁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또한, 고대 중국에서는 남녀 평등보다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 구조가 있었으며, 남성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는 혼인제도인 중궁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당나라에서도 황제가 여러 명의 후궁을 둘 수 있었으며, 후궁을 둔 것은 그 시대의 관습이나 상황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유교사회에서는 황제의 존재가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황제는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서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며, 황제의 권위와 위엄은 반드시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황제의 개인적인 행동이나 가정 생활은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보호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당나라에서도 황제가 후궁을 둔 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라, 궁중 내부의 복잡한 정치적인 배치나 상황에 따라서 결정된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