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가 위서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국의 대표적인 위서로 평가받아 사료적가치가 없다고보는 규원사화는 어떤점에서 사료적가치가 없는 위서라고 평가되고있는건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북한이나 일부 사학계에서는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만, 환단고기를 연상케 하는 내용들이 넘쳐나며 텍스트 비평도 통과하지 못하는 등 많은 문제가 있어서 대한민국의 대부분
사학자들은 규원사화의 내용을 인정하지 않고 책 자체에 대해서도 위서라고 본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병도, 조인성, 송찬식 등의 실증사학자들은 제작연도가 조작되었다고 주장, 이들의 주장은 북애노인이 살았던 효종~ 숙종 시대에는 책에 표현된 천주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책이 처음 선보인 1920년부터 1930년사이 천도교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현존하는 규원사화가 모두 근대에 필사 또는 등사된 것이며 실려 있는 연대나 내용의 오류, 존재하지 않는 옛 책의 인용 등 사료비판에 비춰볼때 일제통치기에 쓰인 대종교 계통의 책으로 위서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규원사화는 1675년(숙종2년)에 북애노인이라는 호를 가진 이가 쓴 역사서입니다. 서문 조판기 태사기 단군기 만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규원이라는 이름은 작자가 부아악(지금의 북한산)기슭에 지은 자신의 서재 이름을 따서 지은 것입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여러 사서들이 출간되어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었지만 작자는 유학자들의 사관은 주체성없는 존화시대 사상에 젖어있다고 비판하면서 유학자들이 외면해온 고기들을 참고하여 우리나라 상고사를 재조명한 것입니다. 특히 단군기에는 1대부터 47대 단군까지 왕명과 재위기간 치적까지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여러차례 외침으로 고서들이 불타없어진 상황에서 고대사를 비록 민족적 영웅주의적 시각으로 썼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사기나 일본의 서기의 기록이 자기나라 본위로 씌여져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규원사화가 갖는 사료적 가치는 너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