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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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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구룡성채는 어떤 배경으로 건설되었었나요?

외견상으로 보기에 건축법에 전혀 맞지 않게 위험하게 건설된 것 같은데 그걸 누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건설하게 되었고 그걸 홍콩 정부에서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나요? 이젠 철거 계획은 없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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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콩 구룡반도(九龍半島)에 1993년까지 존재했던 슬럼입니다. 불청결하고 그로테스크 했지만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고층 슬럼 풍경을 자랑하는 장소였기에, 당시 유명했던 홍콩 영화에서도 일종의 정체성 급으로 자주 등장했었습니다. 사이버펑크 장르의 정신적 고향으로도 회자되며, 철거 전에 일본의 기술자들이 방문해서 설계도까지 그려갈 정도였으니 그래도 세계인들의 뇌리에는 깊이 박히는 장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워낙에 마구잡이로 지어진 건물인데다가 안전상에 문제도 있어서 결국에는 철거되었습니다.

    '구룡성'이라고도 불린다. 홍콩의 주요 언어인 광동어로는 '가우룽싱자이'고, 표준중국어로는 '주룽청자이'입니다. 보통 구룡성채로 불렸지만 1993년에 철거될 당시 구룡채성(九龍寨城)이라고 쓰인 현판이 발굴되면서 원래 이름은 구룡채성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원래 구룡성채는 청나라가 영국을 막는 국경 요새였으나 홍콩이 영국으로 넘어간 뒤 여기만 청나라의 영토로 남아서 치안권이 붕뜬 치외법권이 되었고 그 결과 난민과 범죄 조직이 자리를 잡아서 구룡성채는 양조위, 금성무, 임청하, 왕페이 주연의 영화 '중경삼림'의 무대가 되었던 장소로 유명한 충킹맨션(重慶大廈, Chungking Mansions)과 더불어 한때 외지인이 발을 들여놓으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다는 홍콩의 양대 마굴이었습니다.


    그나마 충킹맨션은 저렴하고 불결한 맨션일 뿐 어쨌든 제대로 된 홍콩 땅이고 교통도 편리하지만, 구룡성채는 차원이 달랐다. 상술한 문제 때문에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으며 교통도 아주 열악했다. 청킹맨션보다도 더 열악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청킹맨션은 남아시아계 홍콩인이 장악하고 구룡성채는 중국본토 피난민이 정착하고 본토에서 밀려난 삼합회가 점령했단 정도다. 어쨌든 1993년 구룡성채가 날아간 뒤 홍콩의 흉물로는 충킹맨션만 꿋꿋이 남았다.
    구룡성채와 비슷한 예로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폰테 타워,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구 콘피난사 금융센터,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의 스캄피아 아파트가 존재한다. 공교롭게도 대한민국에 이름이 비슷한 구룡마을이 존재하는데 이곳도 불법 건축물로 형성된 빈민가이다. 물론 구룡성채만큼은 아니지만 애초에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고층건물 슬럼 자체가 거의 보기 힘든 지형이다.

    출처: 나무위키 구룡성채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콩 구룡반도(九龍半島)에 1993년까지 존재했던 슬럼이다. 불청결하고 그로테스크 했지만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고층 슬럼 풍경을 자랑하는 장소였기에, 당시 유명했던 홍콩 영화에서도 일종의 정체성 급으로 자주 등장했었다. 사이버펑크 장르의 정신적 고향으로도 회자되며, 철거 전에 일본의 기술자들이 방문해서 설계도까지 그려갈 정도였으니 그래도 세계인들의 뇌리에는 깊이 박히는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워낙에 마구잡이로 지어진 건물인데다가 안전상에 문제도 있어서 결국에는 철거되었다.


    '구룡성[4]'이라고도 불린다. 홍콩의 주요 언어인 광동어로는 '가우룽싱자이'고, 표준중국어로는 '주룽청자이'다. 보통 구룡성채로 불렸지만 1993년에 철거될 당시 구룡채성(九龍寨城)이라고 쓰인 현판이 발굴되면서 원래 이름은 구룡채성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래 청나라의 요새로 청의 주전력인 팔기군이 군대로 주둔하면서 홍콩 섬의 영국군을 감시하던 요새였으나 2차 아편전쟁 후 구룡성채가 있던 구룡반도까지 영국의 소유가 되었지만 중국의 소유로 남아있었습니다.

    거의 몽골팔기로 구성된 팔기군은 도주했고 텅 빈 성채는 여전히 청의 영토라 객가사람들인 한족들이 대거 들어가 점령했소, 평범한 성벽 마을이었으나 2차세계대전 직후 지 장소가 거주지가 된 것은 홍콩의 일제강점기인 홍콩일치시기로 1941년 홍콩을 점령한 일본군이 구룡성채의 성벽을 헐었고, 헐어낸 성벽으로 카이탁 비행장의 확장을 시도해 일본 육군항공대 소속 대형 항공기의 이착륙을 용이하게 하다 1945년 일본제국이 패퇴하여 일본군도 쫓겨나고 다시 영국 땅이 된 후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수많은 중국 대륙 남부 출신 부랑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거주구역이 되었습니다.

    철거는 1993년부터 시작되어 1994년 4월 완료되었고, 홍콩 정부는 이곳을 구룡채성공원으로 조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