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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비기와 도참설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요.

조선후기 사회불안이 심화되어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의 의식이 향상되고 민심의 이반과 도적이 확대되었다고 하는데요. 이때 등장한게 비기와 도참설이라던데 이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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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간의 길흉화복이나 국가의 장래에 관하여 도참사상 및 음양오행설에 의해 예언한 기록으로 공공연하게 발표할수없는 비밀스런 기록이라는 뜻에서 비기 라고 불렸습니다.

      대체로 천문, 역산, 음양, 점후 등에 관한 내용이 중심으로 유형별로는 조상이 자손의 장래를 염려해 남겨 놓은 것과 국가의 장래에 관한 것, 개인의 운명과 관계 되는 것 등이있습니다.

      도참은 내용, 형식에 관계없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 혹은 징조를 통칭하며 인간 생활의 길흉화복 또는 성쇠득실에 대한 예언 혹은 징조를 가리킵니다.

      도참서는 미래의 일을 예견하는 책 또는 예견하는데 사용되는 책으로 한국에는 도참서를 비기 라고 부릅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음양도참사상의 유입과 동시에 수많은 비기가 만들어졌는데, 몇 가지 대표적인 저술이 전합니다.


      ≪정감록 鄭鑑錄≫은 고려의 창립과 멸망 및 조선의 건국과 멸망, 그리고 정씨 조선의 계룡산 도읍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기록입니다.


      ≪운기귀책 運奇龜策≫은 조선시대 말엽부터 계룡산으로 도읍이 확정될 때까지 일어날 중요 사건들을 연도별로 예시해 놓은 기록입니다.


      ≪동세기 東世記≫는 이성계의 28대 후에 조선이 망한다는 점과 일본의 침략을 받아 개화한다는 점을 예언하고, 남북 분단으로 민족의 비극이 생기며 통일의 대업을 이루어 계룡산에 정씨가 도읍할 때까지 일어나게 될 사건들을 연대에 따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한산림비기 三韓山林祕記≫는 우리 나라 산천의 생김새와 산맥의 분포 등을 설명하고, 산천의 정기와 성정(星精)이 서로 조화되어 도읍지가 정해지는 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삼국의 도성이었던 경주·부여·평양, 그리고 고려의 송도가 주변 산천의 아름다움과 정기 응집의 강약에 따라 도읍지로 지속된 시기가 달라짐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어서 한양이 그 수려함 때문에 조선 500년의 수도가 되나 북악과 남악의 겁기(劫氣:험한 산의 무시무시한 궂은 기운)로 전란과 재난이 끊일 사이가 없게 됨을 밝히고, 계룡산의 빼어난 지세로 정씨 조선의 800년이 보장된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오백론사비기 五百論史祕記≫는 조선시대와 민족항일기가 지난 뒤 경인년에 남북간에 전쟁이 일어나 열 사람 중 두 사람이 죽게 된다는 것과, 그 뒤에 일어날 사건들을 은어로 기록해 전하고 있습니다.


      ≪옥룡자기 玉龍子記≫는 옥룡자 도선(道詵)이 우리 나라의 지세를 살펴보고 산세의 생김새에 따라 조선 말기에 일어날 사건과 그 추이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무학비기 無學祕記≫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이 많아 왕사(王師)로 대접받은 무학대사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선비기 道詵祕記≫는 도선과 일행선사(一行禪師)가 우리 나라 산천의 길흉에 대해 나눈 문답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 말기의 혼란 끝에 조선이 망하고 결국 계룡산에 정씨의 도읍이 들어서게 된다는 예언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북창비기 鄭北窓祕記≫는 조선 말기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야 된다는 내용과 남북이 분열되어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한다는 것, 그리고 계룡산에 정씨의 도읍이 들어서게 된다는 것 등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참은 세운과 인사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며 은어를 많이 사용한다. 중국 고대 복희씨 때에 황허강에서 용마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하도의 도와 참이 합쳐서 이루어진 말로 보이며, 참위라는 말보다 먼저 생겼다. 중국 주나라 말기, 천하가 오래도록 혼란에 빠지게 되자,

      사람들이 평화를 갈구하며 살길을 찾아 방황하였다. 이와 같은 민중의 욕구에 호응하여 일어난 것이 도참사상이며, 음양오행설 ·천인감응설·부서설 ·풍수지리설 등을 혼합하여 천변지이(天變地異)를 현묘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에 이미 도참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면, 660년(의자왕 20)에 귀신 하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라고 연거푸 외치고 나서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자리를 파게 하니, 길이 90cm쯤 들어가서 거북 한 마리가 나왔는데,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는 참언의 구절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도참설이 구체화한 것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도선국사 때부터이다.

      고려의 건국과 관련된 도참설로는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 최치원이 지은 “계림은 누른 잎이고 송악은 푸른 소나무”란 참언구절이 있다. 이 때문에 고려 현종은 조상의 건국사업을 은밀히 도왔다고 하여, 동왕 11년 최치원에게 내사령을 증직하고, 13년에는 문창후로 추봉하였다. 또 <고려사> <태조세가>에도 철원(태봉의 도읍)의 고경참이 나온다. 그것은 당나라 상인 왕창근이 철원에서 이상한 노인에게 거울을 사서 벽에 걸었더니 햇빛에 비치어 147자의 참문이 보였는데,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일어난다는 내용이었다. 이 참문은 고려 일대를 두고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태조 왕건도 그의 훈요10조에서 이것을 강조하였다. 공민왕 때는 중 신돈이 <도선비기>의 <송도기쇠설>을 이용하여 충주로 천도하기를 주청하기도 하였다.

      현재 민간에 돌아다니는 유일한 비기로 풍수와 도참을 결부시켜 새 왕조의 출현을 예언한 <정감록>이 있는데, 조선 중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나 유래가 분명하지 않다. 과거에는 정감록에 현혹되어 10승지지를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한 사람도 있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참(圖讖) 또는 참위(讖緯)는 내용 · 형식에 관계 없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 혹은 징조를 통칭하는 낱말로, 특히 인간 생활의 길흉화복 또는 성쇠득실(盛衰得失)에 대한 예언 혹은 징조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도참서(圖讖書) 또는 참위서(讖緯書)는 미래의 일을 예견하는 책 또는 예견하는 데 사용되는 책을 뜻하는데, 한국에서는 흔히 도참서를 비기(秘記), 밀기(密記) 혹은 비결(秘訣)이라고 부르며, 《도선비기(道詵秘記)》 · 《토정비결(土亭祕訣)》 등과 같이 책 제목에 이러한 이러한 낱말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도참(圖讖)은 간단히 도(圖)라고도 하고 참(讖)이라고도 한다.

      -출처: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조선의 건국은 무혈로 이루어진 역성혁명(易姓革命)이었으므로 초기의 정치·문화·사회·기타 모든 부문은 고려의 기반 위에 있었다. 조선의 문물이 새로 정비되고 유교식 개편이 완성된 성종 때에 이르면 비기도참사상이 일단 주춤하다가, 잇단 사화(士禍)와 임진·병자의 양난으로 국내외 정세가 심상치 않게 될 때에 다시 성행하게 된다. 왕조의 변혁기에는 늘 도참이 있었다.

      조선의 건국을 전후해서는 ‘십팔자위왕’이 꾸준히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고, 권근(權近)의 건원릉비(健元陵碑)에는 태조가 처음 국상(國相)이 되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면서 “이것으로 나라를 바로잡으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서운관(書雲觀) 소장의 비기도참에도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라는 것이 있어 이씨 조선의 건국을 예언하였다고 전한다.

      즉, 우리 동방에는 왕조의 변혁이 아홉 차례 있는데, 그 가운데 이씨가 나타나 왕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또, 지리산 바위 속에서 나온 비기를 태조에게 올렸는데, 거기에 “목자(木子:곧 李氏)가 다시 삼한을 바로잡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다. 이들은 모두 신왕조의 지지세력이 조작해 유포한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송도는 신하가 임금을 폐하는 망국의 터”라는 참설에 사로잡혀 천도를 계획하였다. 처음 한양을 지목하여 옛 궁을 수리하다가 왕실의 안태지(安胎地:태를 묻는 곳)를 물색하던 권중화(權仲和)가 계룡산이 도읍으로 적합함을 왕에게 상소하자 왕은 직접 답사한 뒤에 그곳으로 일단 마음을 정하였다. 그런데 이 계획을 하륜(河崙)이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① 계룡산의 위치가 국토의 한쪽에 치우쳐 있으며, ② 풍수로도 산은 건방(乾方:서북)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동남)으로 흘러가니, 이른바 물이 장생방을 파괴하고 쇠망이 닥치는 지세인 까닭이라 하였다. 태조가 그럴듯하게 여기고 새 도읍지의 물색을 명하니 하륜은 지금의 연희동과 신촌 일대인 모악(母岳)을 추천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한수(漢水)가 명당으로 들어간다.”는 ≪도선기≫와 어김이 없다면서 결국 지금의 경복궁에 궁궐을 짓고 도성을 쌓아 천도하였다. 정종 때 왕위다툼의 불상사가 일어난 흉방(凶方)을 피하고자 도로 개경으로 옮겼다가 태종 때 한양으로 다시 돌아와 이궁인 창덕궁을 지었다.

      창덕궁으로 옮길 때 척전(擲錢)으로 점을 치기도 하였지만 태종 자신은 비기·도참을 비합리적 미신이라 생각하였다. 1417년(태종 17)에 도참서의 유포와 소장을 금지하는 영을 내리고 당시 서운관에 보관되어 있던 음양·도참 관계서적 중 가장 탄망(誕妄:虛誕하고 망령됨)한 것을 골라 소각시켰다. 이는 한양으로 환도한 지 10여 년 뒤의 일로, 아마도 비기·도참설을 깊이 믿던 태조와 하륜을 의식하였기에 늦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태종 대에 도참서가 된서리를 맞고, 또 유학의 합리주의가 사상과 문학 전반을 지배하게 됨에 따라 도참은 표면적으로는 잠잠해진 듯하였다. 그렇지만 신진사림파와 기성관료의 대립이 심화되어 충돌한 사화 때에도 도참이 한몫을 한 사실은 도참의 사유구조가 얼마나 뿌리깊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폭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중종은 신진사류들을 등용하여 정치에 새 바람을 불어 넣으려 하였다. 그 대표 격이 조광조(趙光祖)인데 그는 철인군주론과 엄격한 소인과 군자의 구별을 강조하면서 과감한 혁신정치를 실현하려 했기에 기성귀족의 미움을 샀다.

      마침내 “일국의 인심이 조광조에게 돌아간다.”는 유언비어가 궐내에 퍼지고 대궐 동산에 ‘주초위왕(走肖爲王:趙氏가 왕이 된다)’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이 중종의 손에 들어갔는데, 이 도참으로 조광조는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당쟁의 와중에서 밀려나 향리인 전주에 내려와 있던 정여립(鄭汝立)은 사람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동지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전해 내려오던 ‘목자망 전읍흥(木子亡 奠邑興:李氏가 망하고 鄭氏가 흥한다)’의 참설이 자신을 가리킨다고 믿어 이 참문을 옥판에 새겨 지리산 석굴에 감추었다가 꺼내서 민심을 회유하였다. 한편, 틈틈이 도당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거사를 계획하였는데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어 산중으로 도망가다가 자결하였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왕조의 운명에 대한 불안감이 커짐에 따라 수도를 옮겨 왕업을 공고히 하겠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1612년(광해군 4) 이의신(李懿信)이 “도성의 왕기(王氣)가 쇠하였으니 가까운 교하(交河)에 이경을 세워 때로 순행함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왕이 예조에 이를 의논하게 하였는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고려의 요승 묘청의 전례를 보더라도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리고 성균관 유생들도 들고 일어나자 이의신은 파직을 당하였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새로 발흥한 청나라 사이의 외교적 줄다리기에 능했지만, 풍수·도참설을 좋아하고 궁궐 내부의 알력을 해결하지 못하여 결국 왕위를 내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는 ≪정감록≫이라는 비기·도참서가 널리 퍼졌다. 이것은 정감과 이심이라는 인물의 대담을 주축으로, 종래의 단편적인 참설과 도선(道詵)·토정(土亭:李之菡의 호)·남사고(南師古)·북창(北窓:鄭Ꜿ의 號)·서산대사(西山大師, 休靜) 등의 이름에 가탁한 비기류들을 편집한 책이었다.

      조선 초기 이래 참위서(讖緯書)에 대해 철저히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비기(秘記)나 감결(鑑訣)이 민간에 전승되어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감록은 이러한 비기·감결류의 집성인 것으로 이해되며, 대략 도선비결(道宣秘訣) 등 비결류 2편,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등 비기류 2편, 화구로정기(華丘路程記) 등 노정기류 2편, 구궁변수법(九宮變數法) 등 수법류 2편, 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先生家藏訣) 2편, 삼도봉시(三道峯詩) 등 시류 2편, 그리고 무학전(無學傳), 피장처(避藏處), 옥룡자기(玉龍子記) 각 1편 등 도합 20여 편의 비기잡문을 통틀어 말한다.

      그런데 내용의 골자는 왕조교체의 법칙에 따른 미래 국토의 예언과 재난의 참상 및 보신처를 지정한 것인데, 미래 국토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씨 왕조가 내우외환으로 세 번이나 단절될 운수를 맞는다는 삼절운수설(三絶運數說)과 새로 등장하는 왕조는 계룡산을 도읍으로 삼는다는 계룡산천도설(鷄龍山遷都說) 및 진인으로 정씨가 왕조를 일으킨다는 진인출현설(眞人出現說)의 셋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감참위(鄭鑑讖緯)의 설이 서북지방에 유행하고 있다.”는 1739년(영조 15) 8월의 기사는 ≪정감록≫이 영조 때에 성립되어 내외의 혼란을 타고 인심을 사로잡았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거기에는 난리를 피하는 가장 좋은 땅이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를 도참의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산 있는 곳도, 물 있는 곳도 아닌 바로 ‘궁궁(弓弓, 또는 弓弓乙乙)’이 이로운 땅이다(山不利 水不利 利在弓弓).”라는 글귀가 ‘도선비결’에 있는데, 과연 궁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였다. 그렇지만 그 구체적인 땅, 즉 십승지(十勝地)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래서 잦은 병화와 피폐한 생활로 이 곳을 찾아 숨어드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영조 이후 억울한 사정을 알리거나 정치적 모략을 위한 익명의 괘서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1748년 이지서(李之曙)를 그 혐의로 공초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755년에는 나주에서 괘서사건이 있었다.

      1773년에는 궐문에 괘서를 기도하다가 미수에 그친 일도 있었는데, 이것은 신임사화를 주도한 김일경(金一鏡)이 죽고 일파인 이인좌(李麟佐)마저 반란을 일으켰다가 평정되자 그 잔당들이 조정을 저주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 영조는 모든 비기·참서를 거두어 민간 유포를 금지시켰다.

      순조 이후 세도정치가 굳어지고 계속되는 기근과 유행병, 그리고 서북인의 차별대우에 항거한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비롯, 민란이 잇따라 혼란이 계속되자 비기·도참은 근절되지 않고 더욱 만연했다. 1804년(순조 4) 이달우(李達宇) 등이 조정을 비방하는 비기를 노래에 담아 퍼뜨린 일이 있었고, ‘관서비기(關西祕記)’가 서울의 사대문에 붙은 일도 있었다.

      청주에서는 김치규(金致奎) 괘서사건과 박형서(朴亨瑞) 괘서사건이 잇따라 터지자 청주목을 서원현(西原縣)으로, 충청도를 공충도(公忠道)로 격하시킨 일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당시의 부패한 정치와 민심의 동향을 반영하고 있다.

      철종 연간에 경주의 최제우(崔濟愚)는 동학(東學)을 창도하였다. 그는 동학을 ‘무극대도(無極大道)’라 칭하면서 5만 년의 태평시절이 올 것이라 예언하였다. 아울러 부적을 몸에 붙이면 상처를 입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불살라 물에 타서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도 하였다.

      ≪일성록 日省錄≫에는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붙잡힌 최제우가 “옛날 임진·임신년에는 ‘이재송송(利在松松)’이라느니 ‘이재가가(利在家家)’니 하였지만, 이제 갑자년에는 ‘이재궁궁(利在弓弓)’이니 ‘궁’자를 살라 먹으면 족히 제어할 수 있다.”고 공술(供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궁궁’은 ‘궁궁을을(弓弓乙乙)’이고 그것은 다름아닌 ‘궁을을 그린 부적’이라고 최제우는 해석하였던 것이다. 철종의 뒤를 이어 고종이 즉위하자 왕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전횡으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의 재건에 온힘을 쏟았다.

      그 경복궁 재건공사 한 달 전에 의정부 건물을 수리하였는데, 그 곳에서 각석(刻石) 하나가 발견되었다. 앞면에는 “계해 말 갑자 초에 신왕이 비록 등극하나 국사(國嗣)가 또 끊어질 터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만일, 경복궁전을 다시 창건하여 보좌(寶座)를 정한다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이어내려 국조(國祚:왕업)가 연장되고 인민이 번성하리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이를 보고도 알리지 않으면 역적이 되리라.”는 말이 동방노인의 비결이라면서 적혀 있었다.

      또 경복궁의 석경루 밑에서 파낸 구리그릇에는 흥선대원군을 칭송하는 한시가 적혀 있었다. 이들은 막대한 비용과 민력(民力)을 필요로 하는 역사에 빗발치는 조야의 비난을 무마하려는 흥선대원군의 계략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