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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에 일어난 목호의 난은 어떤 난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고려 공민왕 시절에 있었던 목호의 난은 어떤 난인지 궁금합니다 상대적으로 낯설고 처음 들어보는 난의 이름인데요 어떤 배경 속에서 일어난 난이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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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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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목호의 난은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에 당시 원의 목장이 있던 탐라(오늘날의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몽골족 목자인 목호들이 주동해 일으킨 반란을 말합니다.

    공민왕의 즉위와 더불어 반원정책이 시행되면서 제주에서 목호와 고려 관리의 대립은 더욱 심해져 목호들이 고려 관리를 살해하거나 원 본국에 요청해 만호부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고합니다.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차지, 고려와 수교한 명은 고려에 대해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북쪽으로 쫓겨간 원의 잔당을 치는데 필요한 제주마 2천 필을 바칠 것을 고려에 요구하였는데 제주 목호의 지도자였던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등은 이에 반발하여 "세조황제께서 방목하신 말을 우리가 어찌 적국인 명에 보낼 수 있단 말인가?"라고하며 350필만 내어주었다고합니다. 이에 명의 사신의 항의에 고려 조정은 마침내 탐라를 정벌할 것을 결정하였다고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별초에 의한 대몽항쟁이 진압된 원종 14년 이후 원은 삼별초가 점거했던 참라에 군민총관부를 설치, 다루가치를 두어 다스렸으며 충렬왕 3년 황실의 말을 탐라에 방목해 목장을 설치했습니다. 탐라가 충렬왕 21년에 고려에 반환된 뒤에도 제주도는 그대로 원 조정의 목장 기능을 했는데 이 목장에서 말을 치는 몽골족 목자들을 목호라 불렀습니다.

    목호의 수는 많을때는 1400명에서 1700명에 이르렀으며 약 1백년 동안 제주도에 주둔하며 현지 주민들과 섞여 살며 말 기르는 기술을 전수하는가 하면 탐라 여인과 혼인해 자식을 두기도 했고 한편으로 탐라에 파견된 고려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부패로 인한 탐라 주민들의 반발심을 교묘히 선동하여 고려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획책하기도 했습니다.

    공민왕 즉위와 더불어 반원정책이 시행되며 제주에서 목호와 고려 관리의 대립은 더 심해져 목호들이 고려 관리를 살해하거나 원 본국에 요청해 만호부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고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차지, 고려와 수교한 명은 고려에 대해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북쪽으로 쫓겨간 원의 잔당을 치는데 필요한 제주마 2천필을 바칠것을 고려에 요구 , 제주 목호의 지도자였던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등은 이에 반발해 세조 황제께서 방목하신 말을 우리가 어찌 적국인 명에 보낼수 있단 말인가? 라며 350필만 내주었고, 명의 사신의 항의에 고려 조정은 마침내 탐라를 정벌할 것을 결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