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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1.30

교황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나요?

카톨릭 교회의 수장은 교황이잖아요.

기독교 같은 경우는 교황 같은 수장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카톨릭은 왜 교황이 있는건지 궁금합니다.

교황이 생기게 된 배경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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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교황(敎皇)은 로마의 주교이자

    가톨릭 전체의 영적 지도자이며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다.

    이는 천주교 전승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교회의 첫 수장으로 임명되어

    천국의 열쇠를 부여받았다는

    성 베드로의 정통 후계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전 세계 14억

    신자들이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세계적으로 정치적,

    외교적으로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초대 교황은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였습니다.

    가톨릭은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천국 문의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여겨지며, 여러 전승에서 천국 문의 열쇠를 가진 문지기로 등장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 후 기독교의 종교적 지도자 중 한 명이 된 그를 초대 교황으로 추대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후의 교황들이 갖는 권리는 여기서 근거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교황(敎皇, 라틴어: Papa)은 교황청 연감에 따르면 사도들의 으뜸인 성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로마 가톨릭의 수장이고, 로마의 주교이자, 서방 교회 총대주교로서 현세 교회의 통괄적 최고 사목자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이다. 또한 바티칸의 국가 원수이다.

    성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12명의 사도들 중 성 베드로에게 특별한 수위적(首位的) 권한을 부여하였고, 성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탁받은 교회의 수장으로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사목하는 권능을 부여받아 로마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 성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하였으나, 그의 무덤 위에는 가톨릭적·사도적(使徒的)·로마 교회의 웅장한 건물인 교황청이 세워졌다.

    기독교 시대 개막 이래 2천년 동안 사도들의 지도자인 성 베드로로부터 시작해 베네딕토 16세에 이르기까지 총 265명의 교황들이 있어 왔다.

    교황은 모든 교회에서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보편적인 최고의 직권을 행사한다. 때문에 교황을 빼고는 세계 정치사와 종교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종교적 또는 세속적으로 최고의 막강한 권력을 누린 자리로 평가받는다. 근래 들어 교황의 역할이 본래의 종교적인 영역으로 크게 축소됐으나 아직도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은 대단하여 교황이 갖고 있는 은연한 위세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교황을 부르는 다른 호칭들

    교황직은 많은 칭호들을 지닌 자리다. 교황의 공식 명칭들은 다음과 같다.

    로마의 주교 (Episcopus Romanus)

    사도들의 으뜸의 후계자 (Successor principis apostolorum)

    그리스도의 대리자 (Vicarius Christi)

    전세계 교회의 수석 주교 (Caput universalis ecclesiae)

    하느님의 종들의 종 (Servus Servorum Dei)

    서방 교회의 총대주교 (Patriarcha Occidentis)

    이탈리아 교회의 수석 주교 (Primatus Italiae)

    바티칸 시국의 국가 원수 (Princeps sui iuris civitatis Vaticanae)

    교황을 부르는 ‘파파(Papa)’는 아버지라는 뜻의 라틴어 ‘papas’에서 유래하였다. 일반적으로 교황에게는 ‘성하(聖下, Seine Heiligkeit 또는 Sanctitas)’와 ‘성스러운 아버지(Heiliger Vater 또는 Sanctissimus 또는 Beatissimus Pater)’라는 경칭으로 부른다.

    역사고대 : 로마 주교좌의 권위 확립

    초기 기독교의 사도였던 베드로가 순교한 땅이자 그의 묘소로서 로마는 하나의 성지였으며, 그리스도교는 옛부터 역사적으로 로마를 존중해 왔다. 또 로마 제국 최대의 도시인 로마에는 일찍부터 교회가 확립해, 그들의 우두머리인 로마 주교는 빠른 시간 내에 교회 내에서 일정한 권위를 가지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다음은, 교회 행정의 중심이 제국의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5대 총대주교좌로 불리는 5개의 교회들이 특히 가장 권위가 있는 곳으로서 확립해 오면서, 그 서열이 문제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가 ‘세계총대주교’로서 두 번째의 선두를 차지하게 되었다.

    6세기 말기,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게르만족들에게 활발히 포교를 하기 시작해, 서유럽 각지에 교회를 세우고 세력을 확대하여, 로마 가톨릭은 동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하여 갔다. 이 때문에 서방 교회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총대주교를 교황이라고 부르게 된다. 특히 칼케돈 공의회 이후, 신약성서의 마태오 복음서 16장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들 중 최초의 제자인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Πετρο). 나는 이 반석(πετρα)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마태 16,18)고 한 말이, 로마 총대주교를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강조되었다.

    서방과 동방의 분리

    서방 교회가 독립성을 획득함에 따라 동방 교회와의 문화적·정치적·종교적 균열도 심해졌다. 이 문제는 8세기 이후, 표면화되어, 마침내 1054년 교회의 대분열이라고 하는 기독교 세계의 최대 분열에 이른다.

    수도 천도 후 곧 서유럽 지역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은 6세기의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 반도를 다시 제국령으로 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지배·비호하에 놓여지게 되었지만, 서서히 동로마 황제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교리나 문화, 교회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된다.

    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한 동로마 제국은 알렉산드리아를 필두로 하는 북아프리카 지역, 안티오키아를 필두로 하는 시리아 지역, 그리고 로마를 필두로 하는 서유럽 지역의 교회와의 분리를 저지하는데 고심했다. 북아프리카나 시리아 지역의 교회는 단성론 문제 때, 결정적으로 분열을 맞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계의 주교를 임명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다.

    그리고,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과는 6세기 무렵의 삼장론 문제나 7세기의 단의론, 8세기의 성상파괴운동 문제, 9세기의 필리오퀘 문제와 거기에 따른 ‘포티오스의 분리’ 등에서 만성적인 불화가 잇따라 일어나, 1054년에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양주교좌가 상호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이것은 주교 간의 상호 파문에 지나지 않고, 동서 교회 간의 파문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양교회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교회의 대분열 이후 화해가 시도된 적도 있었지만, 15세기에 결정적으로 분열을 맞게 되었다.

    그 원인으로서 1204년의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 함락시킨 것과 피렌체 공의회 후 로마가 약속한 군사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서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략당한 일, 또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러시아 정교회가 동서 교회 화해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다만 상호 파문 상태에 있었어도 교황 대사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의 파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부터의 친선 사절 파견은 행해지고 있어서 화해를 위한 교섭은 계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또한 상호 파문은 20세기 중반부터 해소되고 있는 상태다.

    중세 이후

    동방정교회와의 분열 이후 교황의 영향력은 당연히 서방 교회 내부에 한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서방 교회에 대해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강력한 종교적 권위를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중세부터 근대에 걸쳐, 교황은 단순한 종교적 권위자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중부를 중심으로 교황령이라는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영주이기도 했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등 세속 권력과 대립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여기에는 성직 서임권 투쟁과 같은 종교 정책 대립과 교황령의 주인으로서의 교황이 세속 제후들과의 정치적 대립이 있다. 세속 권력과의 대립은 중세 말기부터 아비뇽으로의 교황청 이전(아비뇽 유수기)과 같이 교황청 측의 전면적인 양보로 끝나는 양상을 많이 보이게 된다. 세속 권력과의 타협은, 가끔 다른 세력의 이탈을 불러왔다. 그러한 이탈에는 마르틴 루터 등 종교개혁이라는 이탈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숙모 아라곤의 캐서린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8세의 이혼 허가를 해주지 않았던 것 때문에 일어난 잉글랜드 왕국의 이탈과 성공회의 창설이 있다.

    또 세속 권력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중세부터 근세 초기까지 교횡직으로의 취임에 교회 내의 대립 뿐만 아니라, 세속 권력의 의향이 짙게 반영된 일이 있었다는 것이 지적된다. 또 족벌주의라고 불리는 가족이나 친척의 중용도 중세 말기부터 근세 초기에 널리 행해졌다.

    16세기 중반, 트리엔트 공의회로 대표되는 대응 종교 개혁은, 개신교에 대한 반격과 동시에 그러나 오랜 세월의 타락을 제거하기 위한 교회의 쇄신이기도 했다.

    중세 후기부터 로마 가톨릭에서는, 교회에 있어서의 최종적인 결정권이 교황에게 있는지(교황 우위설) 그렇지 않으면 공의회에 있는지(공의회 우위설) 논의가 되었다. 일단 공의회 우위설이 인정된 적도 있었지만, 종교 개혁 이후의 정세 문제로 인해 사실상 교황 우위설이 주류가 되어 갔다. 19세기 중반,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 우위설을 로마 가톨릭의 교의로서 정식으로 채택했다. 또 이 때, 교황 무류성도 교의로서 채택되었다. 교황 무류성은 오늘날 다른 기독교 교파가 로마 가톨릭과 일치하는 데 있어 최대의 난점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근대 전기에 현저한 교황청의 보수적 경향은 근대적인 사상, 특히 자유주의 등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으며, 또 정치 세력으로서의 교황청의 퇴조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근대 이후

    19세기, 교황령은 두 번에 걸쳐 소멸을 겪어보았다. 이것은 교황의 유럽 내 정치 세력으로서의 퇴조를 결정적으로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 즉위식 때의 비오 7세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소멸당한 교황령은 빈 회의에 의해서 부활했다. 그러나 근대 국가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격동기였던 19세기 중반에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의해 축소당해 1870년의 이탈리아 왕국의 로마 점령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후, 교황들은 스스로를 ‘바티칸의 죄수’라고 칭하며 이탈리아 정부와의 교섭을 거부했다. 그러나 교황 비오 11세 치세에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라테란 조약에 의해 그 결실을 보았다.

    1926년의 라테란 조약의 의해서 성립된 세계 최소의 독립국 바티칸 시국은 교황청이 이탈리아로부터 독립랬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이며, 교황령이라고 하는 의미는 아니다.

    세속 군주로서는 의례적인 권력을 세울 뿐인 교황은 여전히 그리스도교 세계의 최대 교파의 지도자로서 교회에만 머물지 않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특히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역대 교황들은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나 다른 종교와의 대화 자세를 밝히고 있어 그 동향이 주목되고 있다.

    교황 선출

    새 교황은 전임 교황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후 15일~20일 이내에 선출된다. 교황의 선출은 세속 선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될 뿐 아니라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다.

    라틴어로 ‘열쇠로 잠근다’는 뜻의 콘클라베(Conclave)라 불리는 교황 선거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에서 이루어지며 국적이나 출신 등에 관계 없이 80살 이하 전 세계의 모든 추기경들이 투표에 참석한다. 외부와의 소통이 일제히 단절된 채 추기경들은 매일 2번의 비(非)공개 투표를 하며, 그 결과는 전통적으로 짚이나 종이를 태워 알리게 되어 있다. 짚은 검은 연기를 내고 종이는 하얀 연기를 내는데, 연기는 시스티나 성당 내부의 작은 굴뚝을 통해 성당 정면 오른편에 있는 박공 앞의 한 지점으로 뿜어져 나온다.

    성당 밖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연기의 색깔로 새 교황의 선출 여부를 알게 된다. 검은 연기는 새 교황이 아직 뽑히지 않았다는 신호이고, 하얀 연기는 새 교황이 뽑혔다는 신호다.

    이론상 교황 선출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전세계 추기경들이 로마에 도착해 모이는 순간 정치적 선거공작이 시작된다.

    새 교황을 언제까지 뽑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바티칸 역사상 가장 오래 걸렸던 교황 선거는 교황 클레멘스 4세의 후임을 뽑는 콘클라베로 1268년에 열러 2년 9개월에서 이틀이 더 걸린 1271년에야 끝났다.

    새 교황이 확정되면 그는 “수용한다(Accepto)”는 답변으로 공식 확인하고, 수석 추기경이 회랑 가운데로 나와 군중들에게 새 교황의 이름을 발표한다. 그러면 새 교황이 제단사들이 미리 준비한 임시 제의를 입고 군중 앞에 나타나 ‘로마 시와 전세계에게’를 의미하는 라틴어 ‘우르비 엣 오르비(Urbi et Orbi)’라는 말로 첫 축복을 준다.

    교황의 국적

    역대 교황 중 210명은 이탈리아 출신이었고 이 중 99명은 로마 출신이었다. 나머지 55명은 프랑스 출신 16명, 그리스 출신 12명, 독일 출신 8명, 시리아 출신 6명, 팔레스타인과 에스파냐 및 아프리카 출신 각 3명 등이었다.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 폴란드가 각 1명이다.

    교황명

    교황 선거에서 차기 교황으로 결정된 추기경은 교황직 수락 의사를 밝히면서 즉시 자신의 본명을 버리고 평소 존경하던 성인이나 전임 교황의 이름을 골라서 자신의 교황명(敎皇名)으로 삼아 공표해야 한다.

    역대 교황명들 중 가장 많이 선택된 것은 ‘요한’으로 지금까지 통틀어 23명의 교황들이 이 이름을 선택하였다. 그만큼 가장 인기가 있으나 ‘요한’이라는 이름의 교황들이 가장 많이 시해당하거나 유폐되는 등 교회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건들이 이 이름과 관련이 깊어서 교황 요한 23세 이전에는 거의 7세기에 가깝도록 ‘요한’이라는 이름을 택한 교황이 없었다.

    ‘요한’ 다음으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이름은 ‘그레고리오’와 ‘베네딕토’로 둘 다 총 16명이 있으며, ‘클레멘스’는 14명, ‘레오’ 및 ‘인노첸시오’는 13명, ‘비오’는 12명 등이다. ‘베드로’는 초대 교황인 사도 베드로만을 위해 쓰도록 정해져 있다. 어느 누구도 베드로에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교황들 중 처음으로 개명한 이는 교황 요한 2세로 이교도의 신인 메르쿠리우스(Mercurius)라는 이름을 바꿨다.

    교황의 상징들

    삼층관(Triregnum) : 교황이 머리에 쓰는 왕관으로서, 일반 주교관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으로 전통적으로 교황의 즉위 미사 때 사용되어 왔다. 삼층관은 교황의 통치권, 신품권, 교도권을 상징하며, 또한 유럽의 어떤 군주들보다도 교황이 더 위대하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처음에는 왕관 2개를 겹친 듯한 이중관 모양이었으나 1362년 교황 우르바노 5세 때부터 삼층관이 되었다.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세속적 권력의 상징을 담고 있다면서 삼층관을 쓰는 전통을 폐지함에 따라 오늘날에는 자취를 감추었다.

    바쿨루스(Baculus) : 교황이 예식 때 쓰는 지팡이로 목장(牧杖)이라고도 한다. 이는 목자가 양을 칠 때 사용하던 지팡이에서 유래하며 목자의 직무와 권위를 상징한다. 일반 주교의 지팡이는 윗부분이 원형으로 구부러져 있는 반면 교황의 지팡이는 윗부분이 십자가 모양이다. 교황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이라는 뜻이다.

    팔리움(Pallium) : 양털로 만든 띠로 ‘잃었던 양의 비유’(루카 15,1~7)에서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목자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교황의 명예와 자치권을 상징한다.

    어부의 반지(Pescatorio) : 교황이 손가락에 끼는 황금 반지인데, 이 반지는 예수의 수제자였던 성 베드로가 어부였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어부의 반지는 공문서를 봉인할 때 쓰고, 교황을 알현하는 사람은 무릎을 꿇은 채 어부의 반지에 입을 맞추는 인사를 한다. 어부의 반지는 교황이 선종하면 은망치로 부수어 관에 교황의 시신과 같이 넣는다. 이는 해당 교황의 통치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음 교황은 새로운 반지를 맞추어야 한다.

    성 베드로의 열쇠(le chiavi di San Pietro) : 성 베드로가 주저없이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했을 때, 예수는 성 베드로에게 왕국의 문들을 열 천국의 열쇠를 하사해 주었다(마태 16,13~19). 여기서 천국의 열쇠는 지상의 권한을 상징하는 수위권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이 그 권한을 계승하고 있다. 성 베드로가 열쇠를 잡고 있는 표현은 5세기 초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열쇠만을 분리해서 교황의 권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한 시점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이후이다. 열쇠는 처음에는 교황의 종교적 권력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나중에는 세속적 권력까지도 상징하게 됐다.

    교황의 문장

    교황에게는 교황을 상징하는 특별한 문장이 있다. 모든 교황들의 문장에는 삼층관을 포함되었지만, 베네딕토 16세의 문장에는 주교관으로 바꾸었다. 교황관 아래 방패의 배경에는 전통적으로 금열쇠와 은열쇠가 있는데, 이는 마태오 복음서 16장 18절~19절을 참고로 한 것으로, 지상과 천국에서 묶고 매는 교황의 능력을 상징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문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회 문장학에서 열쇠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교황으로서의 지위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한다.

    교황이 되면 달라지는 것

    자신의 성과 이름, 이전의 국적 및 시민권을 버려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때로는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규제를 받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고해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교의상 가톨릭교회 전체를 통솔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다.

    인간이 하는 재판은 받지 않기에 법정에 소환되지 않을 권한을 갖는다.

    교황이 할 수 있는 일

    교령을 승인, 재가 또는 정지시킬 수 있다.

    대사(大赦)를 허락할 수 있다.

    시복이나 시성을 할 수 있다.

    주교를 임명하고 추기경을 지명할 수 있다.

    교구를 설정, 관리, 변경하거나 정지할 수 있다.

    교구장을 보좌할 수 있도록 보좌 주교를 선임할 수 있다.

    교황청 대학들을 설립하고 인준할 수 있다.

    전례서를 출간할 수 있다.

    교회 재단의 재산을 관리할 수 있다.

    교황청에 속한 선교 활동을 수립하고 관리할 수 있다.

    공의회를 소집, 주재하고 폐회할 수 있다.

    거룩한 날과 가톨릭 축일 등을 정할 수 있다.

    새로운 전례를 도입하고 낡은 전례들을 폐지할 수 있다.

    믿을 교리(Dogma)를 공표할 수 있다.

    교회법을 새로 도입하거나 변경, 폐지할 수 있다.

    가톨릭 정통 교의를 이교 및 이단으로부터 수호한다.

    환속을 원하는 수도자들의 서원과 맹세를 풀어 줄 수 있다.

    혼인 관계의 특별 관면을 해줄 수 있다.

    법원의 역활을 한다.

    사법 절차의 규칙을 세울 수 있다.

    문책이나 처벌 조항을 만들 수 있다.

    청문회를 열 수 있다.

    로마 교구를 위해 판사들을 구성하거나 종교 회의 판사들을 지명할 수 있다.

    교황의 교회 내에서의 역할

    교황의 교회 내에서 역할을 교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주님으로부터 사도들 중 첫째인 베드로에게 독특하게 수여되고 그의 후계자들에게 전달될 임무가 영속되는 로마 교회의 주교는 주교단의 으뜸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이 세상 보편 교회의 최고 목자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임무에 대하여 교회에서 최고의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보편적인 직권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교회법 제 331조; 교리서 881)

    교황의 장례 절차

    교황의 장례식은 엄격한 형식과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먼저 교황의 시종관이 교황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난 다음 교황을 상징하는 어부의 반지를 교황의 손가락에서 빼내어 잘게 부순다.

    그 다음에는 교황의 시신은 시스티나 성당으로 옮기는데 추기경들과 바티칸의 주요 인사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시신을 호위한다. 시신이 성당에 모셔지면 하얀색 실크와 특별하게 짠 팔리움으로 된 수의를 입힌다. 시신의 손에는 장갑이 끼워지고 교황의 주교관이 가슴 위에 놓여진다. 교황의 시신은 시스티나 성당의 거대한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 아래서 꼬박 하룻밤을 보낸 다음, 다시 성 베드로 대성당 내 클레멘타인 소성당으로 옮겨진다.

    교황의 시신은 그 곳에서 3일간 수십만 조문객들의 조문을 받는다. 이 전통은 과거 로마 제국의 장례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장례 미사는 대성당 돔 아래에 있는 교황 제단에서 거행된다. 장례 미사가 끝나면 시신은 윤이 나게 잘 닦인 삼중 나무관 속에 안치된다. 그 후 교황의 업적을 기리는 송덕문이 라틴어로 읽혀지며, 그 송덕문은 청동으로 된 원통에 담겨 교황의 발치에 놓인다.

    이때 금화와 은화, 동화 등 동전들을 가득 담은 붉은 벨벳 자루를 시신 옆에 놓아두는데, 그 개수는 교황의 재임 연수에 따라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시신의 얼굴을 비단 천으로 덮으면 바로 관을 봉한다. 봉해진 교황의 관은 대성당 제대의 왼쪽에 있는 ‘죽음의 문’을 통해 아래로 천천히 운구되어서 역대 교황들이 묻히는 대성당 지하 묘소 안의 미리 준비된 대리석관 안으로 옮겨진 뒤 거대한 석판으로 덮여져 안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