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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향고래93
거대한향고래9323.05.26
신라시대 화랑의 기원과 주요활동은?

신라시대 김유신도 화랑에 속해있었고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는데요 화랑제도의 기원과 주요활동 및 어떻게 끝나게 되었는지 알고싶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8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화랑도는 신라시대 화랑을 우두머리로 한 청소년 수련단체이다. 단체정신이 매우 강한 청소년 집단으로서 교육적·군사적·사교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화랑집단은 화랑과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었는데 낭도의 수는 많을 때는 1천명이 되기도 하였고 화랑은 신라시대를 통틀어 2백여 명이나 되었다. 국난극복을 위한 인재양성이 시급한 시기에 촌락공동체적 성격의 청소년조직 전통과 국가의 필요가 결합하여 반관반민의 성격을 갖는 조직체로 기능했다. 무사도와 풍류가 결합된 수련을 특징으로 했지만 삼국통일 후에는 본래의 성격이 변질되었다.

    *조직과 수련방법

    화랑도는 한 시대에 하나의 집단만이 존재한 것은 아니다. 화랑도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진평왕 때에도 많을 때는 7개 이상의 화랑집단이 동시에 존재하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 여러 개의 집단을 통솔할 중심기관 또는 중심인물이 필요했던 듯한데 화주(花主)가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되고 있다.

    화랑집단은 각기 화랑 한 명과 승려 약간 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郎徒)주1로 구성되어 있다. 낭도의 수효는 일정하지 않으나 많을 때는 1천명이 되기도 하였다. 화랑은 이 집단의 중심인물로서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직하며, 사교성이 풍부한 진골귀족 가운데서 낭도의 추대를 받아 뽑혔다.

    768년(혜공왕 4) 신라에 사신으로 온 당나라 고음(顧愔)의 견문기인 『신라국기(新羅國記)』에 "귀인 자제 가운데 어여쁜 자를 뽑아 분(粉)을 바르고 곱게 단장해 이름을 화랑이라 했으니 나라사람들이 모두 높이 섬긴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킨다.

    신라시대를 통틀어 화랑은 모두 2백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화랑의 무리 내의 승려들은 월명사(月明師)의 경우에서 보듯 노래 가사를 짓거나 화랑집단이 어떤 의식을 집행할 때 도와주는 등 주로 지적 · 정신적인 방면에서 화랑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만큼 학문적 교양이 풍부한 사람이 뽑혔다.

    한편, 낭도들의 신분이나 자격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수도인 경주에 사는 6부민(六部民)출신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종래에는 이들을 진골귀족 이하 6두품 · 5두품 · 4두품에 이르는 상류계층 출신의 청소년만으로 좁혀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일반 병졸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만큼 3두품 이하 2두품 · 1두품에 이르는 평민들의 자제도 낭도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화랑도는 이처럼 진골귀족에서부터 일반평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분에 속하는, 수도 거주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발적으로 맺어지고 있는 점이 하나의 특징이다. 다시 말해 화랑도는 골품제도와 같이 혈연주의의 원리에 입각해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라, 혈연주의를 초월해 자신들의 의사에 의해 결성된 일종의 결사체라 할 수 있다.

    화랑도는 일정한 기간을 정해놓고 단체생활을 한 듯하다. 신라사회에서는 통상 3년을 하나의 서약 · 수련 · 의무 기간으로 정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화랑인 김유신(金庾信)의 수련기간이 3년으로 나타나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화랑에 대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화랑은 대개 15세부터 18세까지의 청소년으로 되어 있다. 화랑집단의 성원(成員)들은 이 기간 동안 경주 부근의 남산을 비롯해 금강산 · 지리산 또는 최근에 알려진 경상남도 울산군 두동면 천전리 계곡과 같은 명승지를 찾아다니면서 국토애를 기르는 한편 도의를 연마하였다. 이 외에 실제로 지리를 익힌다는 점도 있었다.

    특히, 화랑은 김유신의 경우에서 보듯 혼자서 깊은 산 속의 동굴을 찾아가 단식기도하면서 여러 가지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체험은 최남선(崔南善)이 잘 지적했듯이 “사람의 생명이나 국가의 운조(運祚)주2가 오로지 산신(山神)의 의사 여하에 달렸다고 하여 마치 그리스의 올림푸스에 있어서와 같이 신탁(神託)주3과 예언이 이 산신에 의해 계시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화랑의 인격 전환 내지 자기혁신에 샤머니즘의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화랑도가 연마한 도의는 흔히 6세기 말 진평왕 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제정한 세속오계(世俗五戒)로 생각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귀중하게 여기던 사회윤리 덕목은 충(忠)과 신(信)이었다.

    이것은 화랑도가 제정된 6세기 중엽으로부터 삼국통일을 이루는 7세기 중엽까지의 1세기 동안이 신라 역사상 드물게 보는 국난기였으며, 이러한 시대에 숭상되는 도의는 바로 충과 신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화랑도는 성원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합되어 공동목표를 위해 일정한 기간 동안 수련하는 단체였던 만큼 성원간의 인적 결합관계는 매우 긴밀하였다. 그들 사이의 우정은 단순한 우정관계가 아니었다. 사다함의 경우, 동료인 무관랑(武官郎)과 사우(死友)주4를 약속했고,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통곡한 나머지 그 자신도 병사할 정도로 심각한 관계였다.

    이 점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화랑도 성원 사이에 일종의 동성애가 행해진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어떻든 화랑도 성원간의 우정관계나 단체의식은 매우 강해 성원의 어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할 경우에는 가해자에 대해 일종의 사법권을 행사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랑도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화랑은 고대 신라에 있던 청년, 청소년 으로 이루어진 심신 수련 및 교육단체로 주 목적은 심신수련이었다고 하지만 창설초창기부터 주 목적은 관리, 군인 양성이었습니다.

    화랑은 전국의 인재를 화랑의 매력으로 모으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모인 인재를 화랑과 휘하에 모인 낭도들 간의 공동 생활로 결속력 , 단합력을 다지고 교육해 그 중 능력이 우수한 자를 천거해 뽑아 신라의 군인, 문무관직에 올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화랑의 시작은 진흥왕때 기원은 신라에서 제일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 둘을 뽑아 그들을 매개로 인재를 모으는 원화제도였는데 두 원화 남모와 준정 간에 서로 간의 시기심으로 살인 사건이 일어나 원화제도는 폐지되었고 이후 같은 역할이지만 여자 대신 곱상한 남자들을 모집해 화랑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화랑제도는 진흥왕 37년 원화제도가 폐지되며 새로운 인재 양성기관으로 진흥왕때 설치되었던 기존의 품주가 개편되어 위화부령 아래 좌우 두 부로 나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화랑도로 발전했고 이후 진지왕 원년에 다시 폐지했다가 신문왕 2년 부활, 경덕왕 16년 이르러 한화정책 차원에서 재편성, 이때 중앙관부의 하나로 편제, 종전의 좌삼부, 우삼부 체제와 달리 좌사부, 우사부를 두어 각기 화랑도의 낭도를 관장하도록했으나 고려시대 들어 점차 쇠퇴하다 조선시대에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화는 꽃처럼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뜻으로, 원래 화랑제도가 있기전에는 아름다운 여성 2명을 우두머리로 두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 한 명이 질투심으로 인해 또다른 한 명을 살해하게되고, 이를 알게된 왕이 원화제를 없애고 화랑제도로 개편한것입니다

    화랑제도란 꽃처럼 아름다운 남성이라는 뜻으로, 전쟁이나면 평민 출신의 낭도들과 함께 싸웠죠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자료에 따르면 화랑의 구성과 활동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존재합니다.

    화랑도, 즉 화랑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한 시기에 몇 개나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7개 이상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신라 전 시기에 걸쳐 화랑이 모두 2백여 명이나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 구성을 보면 먼저 화랑은 귀족 자제 중에 아름다운 이를 뽑아 삼았으며, 자발적으로 그를 따르는 무리가 낭도가 되었다. 낭도의 신분에 대해서는 왕경 지역의 평민까지 포함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화랑도에는 불교 승려들의 관련성도 보이는데,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세속 5계를 받았다든지, 월명사(月明師)가 기파랑(耆婆郞)을 찬하는 향가를 지었다든지 하는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화랑도의 명적을 풍류 황권(風流黃券) 또는 황권이라고 하였는데 승려도 여기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화랑도의 일상적 활동은 수련과 가악, 그리고 유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이들이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가악(歌樂)으로 서로 즐겼으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하였다. 죽지랑(竹旨郞)의 낭도 득오(得烏)는 풍류 황권에 이름을 올려 놓고 매일 출근하였다고 하였는데, 이처럼 일정하게 모여서 수련을 하였을 것이다.

    화랑도가 연마한 도의에 대하여 최치원(崔致遠)은 난랑비(鸞郞碑) 서문에서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어 이것을 ‘풍류(風流)’라고 하는데, 그것은 3교(三敎)를 포함한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유교의 가르침으로는 ‘들어오면 집에서 효를 행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함[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도교의 가르침으로는 ‘무위의 일을 하고 불언의 가르침을 행함[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불교의 가르침으로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듦[諸惡莫作諸善奉行]을 들고 있다. 이는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전했다고 하는 세속 5계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세속 5계는 잘 알려진 대로 ‘임금 섬기기를 충으로써 할 것[事君以忠]’, ‘어버이 섬기기를 효로써 할 것[事親以孝]’, ‘친구 사귀기를 신으로써 할 것[交友以信]’, ‘전쟁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말 것[臨戰無退]’, ‘생명 있는 것을 죽일 때 가려서 할 것[殺生有擇]’을 말한다.

    1934년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는 두 사람이 충도(忠道)를 집지하고 큰 과오가 없기를 맹세하였는데 이 역시 화랑도의 수련 전통과 통하는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다음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100500&code=kc_age_10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화랑의 제도적 설치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진흥왕 37년(576)에 기술되어 있다.[2]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이보다 앞서 화랑 사다함(斯多含)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어 화랑도의 기원을 원화(源花)가 만들어진 때부다 훨씬 이전임을 암시한다.[3] 화랑도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확립되지 않았지만 삼국 전체에 행해 오던 우리 고대 사회의 독특한 기풍, 애국심 혹은 종교가 신라에 와서 화랑도로 정립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화랑도의 이념은 오로지 개인의 수양과 단련을 통한 국가에의 봉사였으므로, 서로 도의를 닦았고[相磨以道義], 가악을 즐겼으며[相悅以歌樂], 명산대천을 찾아다녔다[遊娛山川, 無遠不至], 또한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준수했다. 또 경문왕(景文王)의 고사에 관련되었듯이 ① 겸손하고 ② 검소하고 ③ 방자하지 않는 삼이(三異)를 생활신조로 삼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