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미 증식 계획에서 증산량이 목표 반출량보다 적었을때
일제가 1920년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한 것은 일본내 쌀 부족이 원인입니다. 즉, 한반도에서 쌀을 증식하여 반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실제로 일제는 조선에서 개간, 품종개량, 수리시설 확충 등을 시행하여 쌀을 증식할 수 있엇습니다. 하지만 목표만큼은 증식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1930년 쌀 생산량은 1920년보다 약 250만석이 늘었지만 반출량은 430만석이 늘었습니다. 즉, 증식량에 비해 반출량이 180만석이 더 많았으며, 이는 국내에서 소비할 쌀을 줄게 하여 식량사정을 악화시켰습니다. 따라서 산미증식계획으로 쌀이 증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증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국내 소비를 희생시켜 더 많이 수탈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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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이 고려를 침략한 표면적 명분이었던 강조의 정변이란 무엇인가요?
거란이 2차 고려를 침입(1010)한 것은 강조가 목종을 폐위, 살해하고 현종을 옹립한 강조의 정변입니다.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목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을 왕위를 앉히려는 의혹이 있었습니다. 목종을 둘러싼 천추태후, 김치양 세력의 전횡을 문제 삼아 군사를 이끌고 개경에 들어갔으며, 목종마저 폐위하고 대량권군을 현종으로 세웠습니다. 강조는 강조를 벌하겠다며 1010년 11월 성종이 40만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것이 2차 고려-거란 전쟁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1차 침입하여 강동 6주까지 내어주며 송과 단교를 요구했으나 고려가 이행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제재를 위해 침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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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의 사적인 결함이 공적인 업적의 평가를 바꾸어야 한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난감한 질문이네요. 사적인 결함을 공적인 업적 평가로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적 행위'라는 이름만으로 평가에서 제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적인 관계나 생활 방식이 공적 역할과 무관하고 피해도 제한적이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공적 신뢰를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적인 행위가 누구에게 피해를 주거나 공적인 연관성 여부를 따져 평가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 규범과 선택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잘못을 정당화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공적 업적과 사적 과오를 함께 밝혀야 합니다. 공적인 업적 평가을 기준으로 사적 결함을 재외하거나 감소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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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서 돼지 고기를 먹지 않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슬람교에서 돼지고기를 먹지않습니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에서 돼지고기를 금지하기 때문입니다. 꾸란 6장 145절은 돼지고기를 리즈스(불결한 것)라고 표현하지만 그 말만으로 위생이나 질병이 금지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슬람 신앙의 답은 신이 금지했기 때문에 돼지고기는 물론이고 돼지기름 등 돼지 유래 식품도 대체로 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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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거란의 침략에 맞서 조성한 초초대장겨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당시인 1011년 거란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조성했습니다. 초조대장경은 1087년 완성되었으며, 뒤에 대구 부인사에 봉안되었습니다. 고려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숭상하였으며, 국가적 위기를 불교로 극복하려는 호국 의지를 반영한 것입니다. 또한 왕실과 사회가 힘을 모아 불교 경전과 인쇄 문화를 발전시킨 것이기도 합니다. 즉 초조대장경은 고려의 학문, 목판 인쇄 기술과 문화적 역량을 보여주었습니다. 국가가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국난 극복을 기원하고 사회적 결속을 꾀한 사업입니다. 초조대장경 목판은 1232년 몽골의 침입 때 불탔고, 이후 고려는 다시 대장경을 조성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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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패배를 경험한 사회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공동체의 자긍심을 지키는 것 중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역사적 패배를 경험한 사회는 과거의 잘못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영원히 책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며,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과거의 책임을 오늘의 모든 구성원에게 돌릴 필요는 없습니다.잘못을 성찰하고 재발을 막으려는 노력도 공동체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중요한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사실을 공유하고 피해자의 기억을 존중할 때 역사적 책임과 사회적 통합을 함께 추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나치 정권의 홀로코스트와 전쟁 범죄를 부정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추모, 교육, 배상 등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범죄를 인정하는 일을 통해 인권과 민주주의 수호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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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토지제도와 민정문서의 여부
현재 남아 있는 민정문서는 일본의 동대사 쇼소인에 보관중에 있습니다. 민정문서는 통일 신라 서원경 부근의 4개 마을의 인구, 토지, 가축 나무 등을 기록한 장부입니다. 3년에 한번씩 조사하여 기록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삼국시대에도 호구 조사와 장부가 있었을 가능성은 높으나 현재 이를 뒷받침할 자료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삼국시대 토지제도는 기록이 충분하지 않지만 왕토사상에 근거하여 수조권은 국가 행사하나 실제로는 농민의 사유지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식읍은 왕족과 공신에게, 녹읍은 관리들에게 부여한 수조권과 노동력 징발권을 말합니다. 화랑도는 신라 고유의 청소년 수련 단체로 진흥왕 때 국가 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화랑도는 삼국 통일 전쟁 때 인재를 기르고 군사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전쟁의 필요성이 줄고 국학 같은 교육기관이 자리 잡으면서 화랑도의 군사적·교육적 비중이 약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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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중에서 가장 짧게 왕노릇을 한 왕은 누구인가요?
조선 국왕 가운데 가장 짧은 기간 동안 재위한 왕은 12대 인종입니다. 인종은 중종의 아들로 1544년 즉위하여 154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8개월 왕위에 있었습니다.인종은 왕위에 자진해서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병약하여 사망한 것입니다. <인종실록>에 의하면 병세가 악화되어 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정확한 병명을 알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질 등 특정 질병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병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봅니다. 다만 일부에서는 문정왕후의 독살설도 전해지지만 확정된 역사적 사실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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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에서 단두대가 대혁명 시기 대량 처형에 쓰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프랑스 혁명 전 프랑스에서 처형 방식이 죄인의 신분에 따라 달랐습니다. 귀족은 주로 참수형을 받았지만 평민은 교수형이나 더 잔혹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의사 조제프 기요탱은 사형제를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모든 사형수에게 같은 방식의 처형을 적용하고 고통을 줄이자고 주장했습니다. 기요탱이 직접 단두대를 개발한 것은 아니며, 외과 의사 앙투안 루이가 설계에 관여하여 만들어졌습니다.그리고 1792년 프랑스의 공식 처형 방식으로 도입되고, 국민공회 당시 공포 정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단두대의 역사는 평등하고 인도적인 형벌을 만들려는 취지와, 그 장치가 공포정치 아래 대량 처형에 동원된 현실이 함께 존재한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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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라는 학문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으며, 고대 인류는 어떤 이유로 수학을 처음 발전시키게 되었나요?
수학은 어느 한 시점부터 발명한 학문은 아닙니다. 수 세기를 거치면서 시작해 발달한 지식입니다. 약 2만년 이상 된 이샹고 뼈에서 줄무늬가 새겨져 있어 셈이나 기록에 쓰였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기원전 4천년 경 문자 기록이 남아 있는 초기 수학은 메소포타미아에서 행정, 회계와 함께 나타났습니다. 도시와 국가에서 곡물, 가축 물품, 노동자에게 줄 배급, 세금과 거래를 기록하고 계산할 필요에 의해 수학 개념이 형성되었습니다. 이후에는 토지 측량, 관개와 건축, 달력과 행정에도 계산이 쓰였습니다. 이집트 문명 지역에서도 유사하게 토지 측량과 곡물 관리 등의 수학을 활용했습니다. 즉, 수학의 뿌리는 수량을 재고 기록하는 일에 있으며, 문자 기록으로 확인된 시기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이 출현과 더불어 발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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