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는 왜 해금정책으로 대외 교류를 제한했나요?
명나라가 정화이 남해 원정 이후 해금 정책을 한 이유는 왜구와 해적의 위협 때문입니다. 명나라 건국 이후 중국 연해는 왜구가 빈번하여 납치,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이 때문에 연해 주민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여 약탈 대상을 엄격하게 차단하고, 무로마치 막부와 감합 무역을 통해 통제된 무역만 허용했습니다. 이것은 해상 무역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키운 지방, 해양 세력의 성장을 억제하여 국가가 무역 이익을 독점하려는 의도도 포함됩니다. 즉, 명나라는 왜구와 해적의 약탈 방지도 있지만 지방 세력 억제로 중앙 집권화 강화, 그리고 조공 무역을 통한 중화적 국제 질서를 유지하려고 해금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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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왜 한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폈나요?
원나라는 인구를 4등급으로 나누어 통치하였습니다. 가장 높은 몽골인 아래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인 등을 '색목인'라 하여 중간 지배층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금나라 치하의 한족과 여진, 고려인, 거란인을 '한인', 그리고 가장 낮은 신분은 남송 출신의 '남인'입니다. 남인을 가장 천시한 이유는 소수의 몽골족이 광대한 중국을 장기간 통치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남송이 몽골에 가장 늦게까지 저항한 것도 요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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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에서 여성덴노는 없었나요?
일본의 역사에서 여성 덴노가 8명 10대나 있었습니다. 6세기 아스카, 나라시대에 스이코 덴노는 여성 최초의 덴노입니다. 35대 고교쿠 천황, 사이메이 천황, 41대 지토 천황, 43대 겐메이 천황, 44대 겐소 천황, 46대 고켄 천황, 쇼토쿠 천황이 있습니다. 그리고 에도시대에도 109대 메이쇼 천황, 마지막으로 117대 고사쿠라마치 천황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재위하였으며, 대부분 남성 후계자가 성년될 때까지의 중계 역할이었고, 자녀를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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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는 '기억'보다 '기록'이 더 중요해질까요?
기억 자체는 부정확합니다. 게다가 인간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록은 그 순간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법적 증거 및 역사적 사실이며 진실성을 보장합니다. 게다가 오늘날은 다양한 기록 장치들이 발달하고 있으며, 진보합니다. 음성, 영상 등 다양한 장치를 통해 기록할 수 있으며, 이는 기억의 보조 수단이며, 역사입니다. 또한 개인의 기록이 쌓이면 사회 전체의 지식과 경험이 축적임, 세대간 지식 전수, 문화 보존, 역사 왜곡 방지에 기여합니다.하지만 기록은 사실을 저장하지만 기억은 해석과 의미를 만듭니다. 인간의 기억은 선택적 망각을 통해 치유와 성장도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의미블 부여하는 기억의 역할이 중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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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제국은 왜 여러 종교와 민족을 포용하는 통치 방식을 택했나요?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제국임에도 불구하고 타민족과 종교 등에 관용적인 통치를 시행했습니다. 이는 통치 비용의 절감을 위한 것입니다. 정복지 지역의 종교와 문화를 강제로 바꾸면 반란과 저항이 발생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통치 비용이 지출해야 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즈야만 지불하면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를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밀레트 제도를 통해 각 종교 공동체에게 일정 자치권을 부여하는 간접 통치를 시행하여 반발과 저항을 약화시켰습니다. 반면 개종우로 인한 지즈야 면제, 데브시르메 제도를 통한 예니체리 채용 등을 통해 인재를 흡수하는 정책을 병행했습니다. 이와 같은 오스만 제국의 포용정책으로 다민족, 다종교 지역을 600년 이상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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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이슬람 국가들은 좀 꽉막힌 이미지인데 어떤계기때문에 그런걸까요?
과거 중세 이슬람은 학문, 과학과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개방적이지만 오늘날은 보수적, 폐쇄적인 이미지가 강합니다. 이는 19세기 서구 제국주의 침략으로 식민지화와 주권 상실로 반서구 감정이 심화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20세기 독립 이후 부패한 정권과 경제적 불평등으로 민심이 이탈한 것도 요인입니다. 또한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슬람을 정치 이념으로 하여 반유대, 반서구화 정책 추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911 테러, IS 등장으로 테러와 연결되는 이미지가 굳어진 것도 요인입니다. 게다가 서구 미디어의 부정적, 극단적 보도 편향으로 빚어진 것입니다.즉, 서구와 갈등과 부패와 경제적 불평등, 극단적 이슬람주의, 테러와 연계 등으로 부정적 이미지가 심화된 것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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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동쪽에 있었다는 거인국신화는 어떤 배경으로 있는 내용인가요?
<신당서>에 '신라 동쪽으로 장인을 막고 을 막고 있는데, 장인이란 것들은 키가 3장(9미터)인 사람으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도 '신라국은 동남으로는 일본과 더불어 이웃고 동쪽으로는 장인국과 접한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소문을 기록한 것이라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거인국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지만 신라 동북쪽, 동해상, 동해 건너편으로 다양하나 신라 동쪽인 것은 공통적입니다. 그런데, 거인국에 대한 기록은 신화적으로 과정된 것이고, 미지의 세계에대한 두려움을 표현입니다. 특히 발해나 말갈 등 북방 민족 등 외세 대한 묘사일 수도 있습니다. 즉, 거인국은 실재한 나라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상상력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신화적 기록으로 이해되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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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의 대표적인 패자에게 씌워진 역사적 왜곡에는 무엇이 있나요?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 할 정도 승자는 미화하고, 패자는 부정적으로 왜곡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백제의 의자왕은 나라를 망친 왕으로 기술되기 일쑤인데, '삼천궁녀를 둔 향락의 폭군'이라 묘사됩니다. 하지만 의자왕은 초기에는 효행이 높고, 개혁 군주였습니다. 나당 연합군의 강력한 침공으로 멸망했으며, 삼천궁녀설은 의자왕을 폄하하기 위해 만든 과장입니다. 그리고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외교는 현실적인 외교 정책이었으나 당시에는 패륜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오히려 광해군은 전후복구와 대동법 시행 등 개혁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또한 정여립 모반 사건에 대해선도 당시 역모를 꾀한 반역자로 기술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서인 세력이 동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조작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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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조들은 한옥 창호문으로 어떻게 겨울을 버텨냈을까요?
과거 한옥의 문은 유리대신 창호지를 사용하였습니다. 창호지는 주변에 얇은 공기층을 형성하여 열 보존을 돕고, 공기 순환이 좋습니다. 유리보다 9배 단열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창호지를 문살 안팎으로 이중으로 바르면 더 이중창 효과도 있다고 합니다. 가을마다 문풍지를 바르고, 기존 창호지를 붙입니다. 그러면 겨울에는 창호지가 팽팽해져 더 단단해 집니다. 옛날 선조들은 창호지의 우수한 단열 성능과 덥루어 온돌의 강력한 난방과 화로 등의 보완 단열로 겨울을 슬기롭게 견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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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는 '익명'이 최고의 사치가 될 수 있을까요?
요즘은 개인정보가 비밀이 아닐 정도로 공개된 것을 수용해야할 시기입니다. 그런데, 머지 않은 미래에는 익명성이라는 것은 사치품이 될 수 있습니다. 기술적 추적의 보편화로 얼굴 인식 기술, 위치 추적, 생체 인식, AI 분석을 통해 개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모든 행동이 기록되고 감시될 것입니다.특히 기업들은 개인 위치 정보를 수집하여 맞춤형 서비스 제공 등 상업적으로 활용하고, 제 3자에게 판매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한 국가 안보와 범죄 예방 등을 위해서도 감시 사회가 심화될 것입니다. 게다가 익명성을 유지하려면 추가 비용이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비용도 많이 들 것이기에 사치로 여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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