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괴물의 역사기록에 대해 궁금합니다.
청나라 초기 용을 닮은 동물이 천지에 솟아올랐다는 기록이 있으며, 1903년 사냥꾼 3명이 천지에서 둥근 머리, 황소뿔, 목길이 1.5m의 괴물을 목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08, 에도 비슷한 목격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산천어, 호랑이, 또는 자연 현상에 대한 오인 가능성이 큽니다. 즉, 과학적 실존 증거는 없습니다. 백두산의 역사상 영유권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 조선 등 우리 민족의 활동 근거지입니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 건립 이후 19세기 중반 영토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62년 백두산 절반을 북한과 중국이 분점에 따라 천지의 54%는 북한이 영유하고 있습니ㅏ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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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가 수양대군의 책사 입니까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한명회는 단종을 단종을 유배보내고, 처결하는 냉혹한 인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실제 한명회는 친구 권람의 소개로 수양대군을 만납니다. 그리고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김종서 등을 죽이는 계유정난을 주도하고, 살행부를 작성한 인물입니다. 계유정난 성공과 단종 복위운동, 사육신 주살 등에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세조의 즉위와 왕권 강화의 일등 공신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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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경복궁은 조선 백성들이 불태운 것이라는 것과 아니라는 의견이 갈리던데 어떤 쪽이 더 신빙성이 있나요?
경복궁의 소실에 대해서는 백성들에 의한 방화가 유력합니다. <선조실록>과 <징비록>에 따르면 백성들이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보물을 약탈하며 궁궐에 불을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피난하자 백성들이 '임금이 우리를 버렸으니 우리도 이 나라를 버리겠다'라는 격분으로 왕의 권위가 상징된 궁궐을 붙태운 것입니다. 백성들은 장예원과 형조에 보관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보물을 약탈하고 불을 지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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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도 충신으로 유명한 위인들이 있나요?
삼국시대 충신을 유명한 인물로는 백제의 계백 장군이 있습니다. 계백은 백제 말기 1599년 황산벌 전투에서 5000명의 백제군의 이끌고 신라의 5만 대군을 맞아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의자왕에 충언을 다한 성충고 흥수도 있습니다.그는 백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온달 장군도 충신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평원왕의 왕녀인 평강공주를 아내로 맞았고, 고구려 장수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목숨을 바쳐 왕실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충신의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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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변해도 변하지 않을 것, 10년 후의 온도를 묻다
기술은 효율과 정답을 주지만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감정을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이라 생각입니다. 음악, 예술, 이야기, 식문화, 신앙 등은 인간이 함께 만들어가며 의미를 나누는 문화도 변화지 않을 핵심 가치입니다. 또한 급변하는 기술 속에서도 꼭 지켜내야할 할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있게 하는 연결과 공감의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즉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인간으로서 가치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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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리부인이 연구 실험하면서 자신의 몸상태
퀴리부리인은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알았지만 방사선이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것임을 정확히 예측한 상태는 아닙니다. 당시에는 방사선의 위험성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퀴리 부부는 라둠을 손으로 만지거나 주머니에 넣어 다니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마리퀴리는 방사선 피폭으로 골수 손상, 빈혈, 관절통, 손가락 궤양 등을 반복적으로 겪었습니다. 결국 1934년 7월 백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라듐이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치료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과학적 열정과 인류에 대한 기여 의지가 방사선 위험을 무릅쓴 연구로 이어졌다고 볼 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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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순신장군님의 학익진 전술을 보고 대단히
이순신 장군의 여러 전과에 대해서는 교과서 등에서 많이 언급되어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백의종군에 대해서는 덜 알려져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정유재란 직전 일본의 계략에 속아 선조의 출격 명령을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삭탈관직을 당합니다. 또한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한 상소문도 있던 상황에서 이순신은 투옥되어 혹독한 국문을 치렀습니다. 류성룡 등의 변호로 참형을 피했지만 의금부 감옥에서 풀려나 관직과 계급을 모두 잃은 말단 군인 신분인 백의종군으로 경상도 합천 초계의 권율 장군진으로 압송되어 갑니다. 하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하고 조선 수군이 궤멸된 뒤 이순신이 다시 복직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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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다윗과 사울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성역에 따르면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이고, 다윗은 그 뒤를 이은 인물입니다. 사울과 다윗은 왕과 신하 관계였으며, 사울은 다윗에게 궁정에서 군사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명성이 높아지자 사울은 다윗을 질투하여 적대적인 관계로 바뀝니다. 오히려 요나단과 미갈 등 사울 가문 일부는 다윗을 돕기도 합니다. 성격 밖에 증거가 부족해 사울의 실존은 사실이 부족합니다. 반면 다윗에 대해서는 텔 단 석비 같은 고고학적 자료에서 '다윗의 집'이라는 표현이 나와 후대에 실제 역사적 왕조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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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장군님 께서 겪은 고통과 이겨낸 것이 있다면
강감찬 장군은 948년에 태어나 1031년에 사망한 고려시대 관료이자 장군입니다. 그는 처음 문과 장원으로 관료로 진출하여 한림학사 등의 관직을 거쳤습니다. 거란의 2차 침입(1010) 당시 현종을 안전하게 호종하여 나주로 피신하였으며, 전쟁후 서경 유수를 지내면서 국경 방위군을 통솔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경험이 있어 귀주대첩(1019)에서 승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70세가 넘는 노장으로 거란군 10만을 격퇴했습니다. 비록 문관이지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서경에서 수년간 군대 지휘 경험을 쌓고, 최선을 다해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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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문화가 중국의 어떤시대부터 유입이 되거나 교류가 되었을까요?
페르시아 지역은 활발하게 중국과 교류하며 발달했습니다. 특히 한나라 시기(기원전 202 ~기원후 220) 당시 비단길이 개척되면서 파르티아 제국은 중국에서 안식국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파르티아는 로마, 인도 사이에 위치하여 동서 중계 무역으로 성장했습니다. 한나라는 파르티아로 부터 말, 포도, 석류, 유리와 보석 등을 전달받았습니다. 이후 사산 왕조 페르시아(기원후 224-651)도 중국에서 대식국으로 불리며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특히 조로아스터교는 중국에서 배화교로 불리며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유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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